
콘서트에 다녀왔습니다. 두 시간 정도 진행되었던 것 같은데 사실은 세 시간이었을 수도 있겠어요. 콘서트에 다녀온 경험이라곤 한 번뿐이어서 이번에도 첫 곡이 시작할 때는 손뼉도 치지 못하고 가만히 듣고 있었는데, 끝날 때는 고개와 손을 같이 끄덕거리면서 마이크가 이쪽을 향해 돌려질 때면 짧은 구간을 따라부르기도 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이게 웬 말인가 싶으시겠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생활 방역 안전 수칙을 준수하여 방구석에서 열렸거든요. 정확하게는 제 방 침대 위에서 열렸습니다. 가수와 관객이 각각 한 명씩으로만 구성된 콘서트였어요. 음악 이야기를 잠깐 먼저 할까요. 저는 재생 목록을 몇 달에 한 번 업데이트 할까 말까 하고, 노래를 듣는 날도 한 달을 기준으로 세었을 때 한 손이나 두 손이면 ..
동일시 없는 사랑의 번뇌라는 글을 충동적으로 쓰고, 또 계획에도 없었던 TRPG 글을 쓴 후에는 계획했던 글을 꼭 하나 써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주말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하려고 해요. 주말 다들 잘 보내셨나요? 저는 토요일에는 긴박한 집과 여기공에서 주관한 공구·주택수리 체험 워크숍에 다녀왔고, 일요일에는 DOPE 요가 원데이 클래스에 다녀왔습니다. 주말 사이의 동선이 꽤 길었어요. 그리고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한 새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이민경 작가님이 온라인으로 열어 주셨던 『몸에서 뻗어내는 글쓰기 부산 특강』 중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요. 서사가 일종의 오솔길이라면 창작자는 오솔길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운전석에 앉아 적절한 타이밍에 핸들을 꺾을 줄 아는 사람이다. 독자는 조수석에 앉아 창작..
눈앞에 판다가 있다. 침대 끄트머리에 너비가 비슷한 책상이 있는 탓에, 책상에 앉아 바라보고 있는 모니터 너머로 B의 정수리 위에 올라가 있는 이케아 출신 판다가 보이는 것이다. 이유 없이 B가 선물했던 인형이다. 담양으로 2박 3일 여행이 정해졌을 때 B는 죽녹원에 판다를 데리고 가자고 했다. 죽녹원에 판다 조형물이 많다는 이야기를 하고 난 후의 일로 기억한다. 인형을 데리고 여행을 가본 적은 없었지만, 그러자고 했다. 인형 부피만큼의 짐이 늘었지만 거추장스럽거나 불편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팬더 조형물 앞에서 중년 여행객의 독사진 같은 인형 사진을 찍고 있을 때, 가장자리에서부터 슬그머니 연갈색의 이마가 들이밀어졌다. 색소가 옅고 부드러운 B의 머리카락이 아니라, 그보다 조금 더 밝은색의 골든레트..
좋아하던 남자나 남성상이 사실은 내가 가지고 싶은 특성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은 우리가 자주 공감하고 공유하는 이야기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레퍼토리 아닐까요. 제 경우에는 구체적으로는 큰 키나 벌어진 어깨가 그러했고, 보다 모호한 뉘앙스로 말하자면 일종의 ‘보스‘로서의 면모가 그랬습니다. 전달하고 싶은 이미지가 두 글자에 완전히 담겼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 단어가 아니고서는 전달할 방법이 없네요. 허허벌판 같은 새까만 인테리어에 냉장고에 들어갈 수 있는 물품은 오직 에비앙뿐인 리디광공 스타일과는 조금 다릅니다. 오히려 오래된 마호가니 책상이나 닫힐 때 삐걱거리고 무거운 소리가 나는 철제문이 인테리어 요소에 가깝지요. 외딴 방에 일생일대의 사랑을 감금해 두(고서도 꼬박꼬박 삼시 세끼 밥은 챙겨 먹이..
조금 더 어리고 조금 더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어 의심치 않던 시기에는 꿈이 자주 바뀌었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기도 했다가 알지 못해 모호한 분야의 석학이 되기도 했다가 원대하게는 다섯 번째 세계 성인이 되기도 했는데, 그 꿈과 꿈 사이에 개연성은 없었고 다만 커다랗다는 공통점만 있었다. 스스로의 신체에 관하여 키가 180 언저리까지 자라기만을 바라던 시절의 일이니, 몸도 마음도 크기에 골몰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한결같았던 셈이다. 자리 배정을 위해 키 순서대로 1번부터 끝 번호까지 교실 안에 일렬로 서는 일이 반복되면서 내 번호는 평균값과 작은 오차 범위를 가지게 되었고, 희망 직업도 비슷한 반경 안에서 머물게 되었다. 초등학교 교사, 중고등학교 교사, 교수, 다시 고등학교 교사. 책상 앞에 앉아 교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