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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THE BOSS

칠월[JULY] 2021. 2. 22. 22:58

좋아하던 남자나 남성상이 사실은 내가 가지고 싶은 특성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은 우리가 자주 공감하고 공유하는 이야기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레퍼토리 아닐까요. 제 경우에는 구체적으로는 큰 키나 벌어진 어깨가 그러했고, 보다 모호한 뉘앙스로 말하자면 일종의 ‘보스‘로서의 면모가 그랬습니다. 전달하고 싶은 이미지가 두 글자에 완전히 담겼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 단어가 아니고서는 전달할 방법이 없네요.

허허벌판 같은 새까만 인테리어에 냉장고에 들어갈 수 있는 물품은 오직 에비앙뿐인 리디광공 스타일과는 조금 다릅니다. 오히려 오래된 마호가니 책상이나 닫힐 때 삐걱거리고 무거운 소리가 나는 철제문이 인테리어 요소에 가깝지요. 외딴 방에 일생일대의 사랑을 감금해 두(고서도 꼬박꼬박 삼시 세끼 밥은 챙겨 먹이)는 K-또라이보다는, 긴 직사각형의 테이블에 혈연과 혈연으로 얽히지 않은 인연들을 차등 없이 섞어 앉혀 놓고는 부러질 것 같은 상다리가 가벼워질 때까지 흘러들어오는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모습에 훨씬 가깝습니다.

조바심내지 않는 세심함, 느긋한 다정함으로 요약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면서도 무리의 중심과 방향을 잃지 않게끔 하는 단단한 심지도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의 초연함도 마찬가지고요. 미디어 중에서는 『대부』의 ‘비토 코를레오네(말런 브랜도)’가 가장 유사한 형태니까, 어지간히도 클래식하고 고루한 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나열한 특성들이 상황과 맞물리면서 조금 굴절된 이미지로 나타난 형태들도 참 좋아해요. 『차이나타운』의 ‘엄마(김혜수)’ 같은 모습이요. 하지만 동서양을 통틀어 그런 역할을 여성이 맡은 모습을 보기는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더 『올드가드』의 앤디 역할에 오두방정을 떨면서 환호하기도 했고요. 대전을 배경으로 여성 중학생 세 명의 이야기가 긴장감 넘치게 흘러가는 임솔아 작가의 장편 소설 『최선의 삶』에서도 제가 손뼉을 치며 읽었던 부분은 여기입니다.

 

테이블 두 개를 붙여놓고 여덟 명의 아이들은 둘러앉았다. 각자의 소주잔에 콜라와 소주를 섞었다. 건배를 하고 목을 젖혀 단숨에 삼켰다. 콜라 섞인 소주를 위스키처럼 마신 후, 드라마에 나오는 보스처럼 한쪽 눈을 찡그렸다. 각자의 입술에 담배를 물었다. 두 볼이 합죽해질 때까지 담매를 빨았다. (…) 소주와 함께 있으면 어떤 음식이든 성찬이 되었다. 허겁지겁 숟가락질을 하다가 담배를 물면 우리는 금세 보스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미간을 찌푸리고 연기를 내뱉었다. 담뱃재를 톡톡 털었다.

임솔아(2015), 최선의 삶.

서론이 길었습니다.

이게 사실 보드게임 소개 겸 영업 글이라는 이야기를 여기에서 밝히면 읽다가 어리둥절하시지 않을까 싶어요. 하지만 정말로 그래요. 왜냐하면 임솔아 작가의 문장을 살짝 오마주하면, 이 게임을 할 때마다 다음과 같은 장면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가로가 긴 테이블을 가운데 놓고 여러 명의 여자가 둘러앉았다. 유리잔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제각각이었다. 콜라나 커피, 또는 맥주를 담은 유리잔 표면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동안 몇 건의 거래가 성사되거나 파국으로 치달았다. 제안이 흡족할 때면 카페인이나 가벼운 알코올을 도수 높은 술처럼 마신 후, 드라마에 나오는 보스처럼 한쪽 눈을 찡그렸다. 포식한 악어처럼 웃으며 악수를 나누기도 했다. 같이 가시죠? 같은 문장은 누군가가 호기롭게 물을 때도 사용되었고 따져 물을 때도 사용되었다. 정말 이렇게 하실 겁니까? 표면적으로는 정중함을 위장한 이 질문과 마찬가지로.

 

만 11세 이상, 최소 3인부터 최대 6인까지 사용 가능한 게임의 이름은 『아임 더 보스(I’m the BOSS)』입니다. 출시된 지 오래된 게임이라 대부분의 보드게임 카페에 비치되어 있고, <협잡상> 게임의 대표작으로 뽑히기도 합니다. 아마 접해 보신 레즈라이트 회원분들도 많으리라 짐작합니다. 간략한 기본 소개를 드리자면 플레이 시간은 45분으로 명시되어 있지만 다수가 참여하는 보드게임이 대개 그렇듯이 더 적은 시간이 소요되기도 하고, 더 긴 시간이 필요해지기도 합니다. 게임 진행 방식을 알려 드리자면, 16개의 거래가 나열된 보드 위에서 번갈아 말을 움직이면서 보스가 거래를 여는데, 이 거래에는 다수의 투자자가 필요합니다. 물론 보스 혼자서 모든 조건을 달성해서 어떠한 투자자도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독식하기까지 맞서야 하는 견제가 대개 만만치 않습니다. 보스는 투자자를 모으고, 투자자에게 배당을 어떻게 나누어 가질지 제안하고 협상하며 회유나 협박을 시도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견제는 물론이거니와, 보스가 갈아치워지는 쿠데타도 발생하게 됩니다.

 

​보드게임의 구성물(컴포넌트) 수준이 매우 정교한 것도, 테마에 몰입할 수밖에 없도록 세세한 것도 아닌데 놀랍게도 게임이 시작되면 어떤 여성 집단에서든지 숨겨 왔던 보스의 모습이 순식간에 드러나곤 합니다. 평소에도 누아르 영화에 나올 법한 행동을 줄곧 하는 B는(주: “불만 있는 사람?” 탕! “더 있나?” 라든가 허리춤에 검지 손가락을 겨누고는 “움직이지 않으면 쏜다” 같은 소리 정말 잘하고 자주 함) 비교군이 되기 어렵지만, 서로 여성 다른 집단에서 네 번 정도 게임을 돌려 보았는데 네 번 모두 그랬습니다.

 

“너 정말 이럴 거냐?” “저한테 왜 그랬어요. 말해 봐요. 저한테 왜 그랬어요.” 하는 달콤한 인생에서부터 “내가 김 싸장(꼭 사장 아니고 싸장이어야 함)이랑 밥도 묵고 싸우나도 가고 다 했어!” 하는 범죄와의 전쟁까지, 어딘가에서 들어봄 직한 각양각색의 보스들이 순식간에 헤쳐 모여서는 여자들의 얼굴로 재생됩니다. 맨투맨이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하게 다려진 쓰리-피스 수트로 보일 정도로 냉철하게 거래를 제안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갑자기 부둣가 비린내 냄새를 환청처럼 몰고 와 양아치처럼 다 성사되어 가던 판을 부수어 버리는 극내향성 평화주의자도 나타납니다.

 

게임을 꺼내 규칙을 설명하고 “그럼, 시작해볼까요?” 할 때까지는 분명 그러지 않았는데, 집단 내에서 누구 하나가 누아르 장르의 대사를 하나 읊기만 하면 순식간에 “그럼, 선수 입장~” 소리로 게임을 시작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도록 게임이 진행됩니다. 그렇게 물꼬를 트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해보시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됩니다. 제가 네 번씩이나 운이 좋았기 때문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 왜일까요? 대낮의 조도 높은 방안을 뒷골목의 어둑한 사무실 안으로 옮겨 놓는 분위기에 휩쓸릴 때마다 저는 윤여정 배우의 오래된 인터뷰를 떠올려요.

 

어릴 때 내성적이고 얌전해서 아무도 내가 배우가 될지 몰랐대요. 그런데 원래 세상 다 아는 양아치가 공주 역할 하면 잘하잖아. 그건 걔가 양아치지만 늘 마음속으로는 공주를 그렸기 때문일 거예요. 아마 내가 얌전하고 내성적인 아이여서 여자 깡패 같은 연기가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씨네 21(2003), 세상에 하나뿐인 저 목소리.

아마 ‘그건 남자의 영역이야’라는 소리를 줄곧 들어왔어도, 모든 여자의 마음속에는 보스가 그려져 있기 때문일 거라고요.

그러니까 한번,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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