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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판다가 있다. 침대 끄트머리에 너비가 비슷한 책상이 있는 탓에, 책상에 앉아 바라보고 있는 모니터 너머로 B의 정수리 위에 올라가 있는 이케아 출신 판다가 보이는 것이다. 이유 없이 B가 선물했던 인형이다. 담양으로 2박 3일 여행이 정해졌을 때 B는 죽녹원에 판다를 데리고 가자고 했다. 죽녹원에 판다 조형물이 많다는 이야기를 하고 난 후의 일로 기억한다. 인형을 데리고 여행을 가본 적은 없었지만, 그러자고 했다. 인형 부피만큼의 짐이 늘었지만 거추장스럽거나 불편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팬더 조형물 앞에서 중년 여행객의 독사진 같은 인형 사진을 찍고 있을 때, 가장자리에서부터 슬그머니 연갈색의 이마가 들이밀어졌다. 색소가 옅고 부드러운 B의 머리카락이 아니라, 그보다 조금 더 밝은색의 골든레트리버 이마였다. 판다와 같은 출신의.
그게 벌써 일 년 하고도 사흘이 지난 일이 됐다. 유월이나 칠월이라고 생각했는데 팔월이었구나. 코로나 시대를 맞은 후로 이동성이 줄어든 탓도 있겠지만 작년 담양에서 겪었던 비와 최근의 비를 생각해 보면 아주 다른 세계로 건너와 버린 것 같다. 이걸 양반이라고 하면 좋을까, 아니면 호랑이라고 해야 좋을까. 눈앞의 현상을 문장으로 포착해 옮겨 적자마자 보이던 장면이 헝클어진다. 침대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게임에 골몰하면서도, 머리 위에는 판다 인형을 놓고 균형을 잡은 채, (영문은 모르겠지만) 뒤로 접은 발끼리 서로 손뼉 치듯이 부딪히고 있던 B의 멀티태스킹이 무너진 탓이다. 판다는 이제 B의 허리 위에 배를 벌렁 깐 채 드러누웠고, B는 아는지 모르는지 자빱 방송을 틀어놓은 채 게임에 골몰한다. 나는 B의 발가락이 그리는 열 개의 작은 동그라미와, 거추장스러운지 핀으로 이마 언저리의 머리카락을 죄 뒤로 넘겨서 드러난 둥근 이마를 보고 그대로 옮겨 적는다. B는 이제 발을 손뼉 치듯이 부딪히지 않고, B가 틀어 둔 방송에서는 스트리머가 더 이상 울지 않는다. 눈과 귀와 손과 발로 서로 다른 일을 하고 있던 B가 눈을 마주치고 귀를 기울이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다시 한번 아주 다른 세계로 건너감을 느낀다. 더 작은 단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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