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뮤지컬 를 알게 된 건 지역 페미니스트 모임의 레몬 님을 통해서였다. 시놉시스를 꼼꼼하게 읽지도 않고 추천해주신 텀블벅 링크를 열어 곧바로 후원에 참여했다. 누군가가 추천한 노래나 책을 재생목록이나 장바구니에 담을 때처럼. 도입부터 마음에 들 때도 있고, 아무리 기다려도 좀처럼 마음에 와닿지 않을 때도 있지만 추천한 사람이 있으면 후자여도 괜찮았다.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을까, 어떤 점에서 권해 주었을까를 생각하다 보면 좋은 점들이 꼭 하나씩은 생겨나니까. 오랜만의 뮤지컬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공연 자체가 무산되어 펀딩이 취소될 때는 배로 아쉬웠다. 다시 펀딩이 재개되었을 때는 그만큼 기뻤다. 극단이 다시금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코로나 시대는 종식되지 않..
KBS 강승화 캐스터는 안산 선수의 금메달이 확정된 이후 "여러분은 지금 국가, 인종, 성별에 규정된 게 아닌, 본인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한 인간을 보고 계십니다. 어떤 외부의 저항에도 흔들리지 않는 안산 선수에게 존경을 표합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안산 선수를 향해 쏟아진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안산 선수가 보여준 태도와 성과에는 존경을 넘어 경외심까지 든다. 그러나 국가, 인종, 성별에 근거한 혐오 속에서 버텨낸 한 개인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이야기하는 동시에 우리는 한 개인과 개인의 꿈을 뒤흔들고자 하는 것들이 절대 정당하지 않음을, 뒤흔들고자 하는 목소리에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아야 하며 '허튼소리 말고 입 다물라'고 말해야 함을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금메달을 거머쥐고 꿈을 이루어 포디움에..
실명을 언급하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서로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 것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문화 속에서 자랐지만, 말이 아닌 글 속에 이름을 남겨두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이웃 공개로 쓰는 블로그에서조차 이름을 부르는 대신 이니셜 범벅인 글을 새겨왔다. 부르는 이름 없이도 누구 이야기인지 알 만한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게끔 이름의 세 글자 중 한 글자만을 남겨두면서 글을 써왔다. 이름을 부르는 게 어려워진 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아니고 이름보다 직급으로 부르는 게 자연스러운 문화에 편입되었기 때문도 아니다. 이름을 불렀다가 불린 이름이 다칠까 봐 그랬다. 누구도 해치지 않는 글을 쓰려고 노력하면서,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공간 안에서만 글을 쓰면서, 서로를 해치지 않을 사람들 앞에..
여성주의를 접하며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부조리였다. 화가 나고 예민해지는 순간들이 종종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주 엉망진창은 아닌 곳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는 것을 지각하는 순간부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들숨과 날숨마다 혐오와 배제가 배어 있었다. 그것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시력에 맞는 보조 장치를 드디어 착용한 사람처럼 세계의 부서지고 남루한 곳곳이 눈에 들어왔다. 눈 닿는 곳마다 참담한 기분이 피어오르곤 했지만 그래도 이제야 눈을 제대로 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게 명확해진 것 같았다. 다시 눈을 감고 코끼리 다리를 더듬듯이 세계를 살아가지 않기로 한 건 곁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다른 여자들 덕택이었다. 여자들 사이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웃고, 기대는 방법..
달력 날짜로 이틀이 지났지만, 너그러이 양해를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반드시 필요한 순간이 아니라면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포용으로 알려주신 분이니까요.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배운 ‘죄송 금지’의 원칙을 준수하는 데도 익숙해져서 이제는 모임 내에서 죄송하다고 이야기하기보다는 “죄송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괜찮습니다”를 더 많이 말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 말이 여성에게 불어넣어 주는 힘을 믿으면서요. 오늘도 여성들과 나눈 이야기에서 유사한 말로 대화를 맺고, 여자에게 부칠 두 통의 편지와 한 편의 글을 앞두고 편지를 먼저 골라 쓰다가 편지함을 열었습니다. 생일을 맞았다는 소식은 SNS를 통해 먼저 들었어요. 생일을 기념하는 편지가 도착할 예정이라는 사실도 함께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