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를 접하며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부조리였다. 화가 나고 예민해지는 순간들이 종종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주 엉망진창은 아닌 곳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는 것을 지각하는 순간부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들숨과 날숨마다 혐오와 배제가 배어 있었다. 그것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시력에 맞는 보조 장치를 드디어 착용한 사람처럼 세계의 부서지고 남루한 곳곳이 눈에 들어왔다. 눈 닿는 곳마다 참담한 기분이 피어오르곤 했지만 그래도 이제야 눈을 제대로 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게 명확해진 것 같았다. 다시 눈을 감고 코끼리 다리를 더듬듯이 세계를 살아가지 않기로 한 건 곁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다른 여자들 덕택이었다. 여자들 사이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웃고, 기대는 방법..
『에놀라 홈즈』는 추리물이며 모험담인 동시에 성장기다. 『셜록 홈즈』의 문법에 익숙한 관객들이 ‘추리 영화치고 아쉽다’는 평가를 매긴 것은 이 차이에 상당수 기인할 것이다.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셜록은 이미 완성된 상태로 등장한다. 그는 성인이며, 사용하는 논리와 기술에 능수능란하다. 그러나 에놀라 홈즈는 생물학적으로 열여섯 살 생일을 맞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사회적으로는 고향을 벗어나 본 적 없던 자다. 영화는 ‘어머니 찾기’라는 목적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어머니와 단 둘뿐이던 세상에서 벗어나는, ‘어머니로부터 떨어지기(Break)’ 과정으로 움직인다. 다시 말하자면 영화는 하나의 여성으로써 독립하기 위하여 에놀라가 알을 깨고(Break out of the shell) 나오는 여..
미디어 중독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2016년 언저리였으나 당시에도 연구 주제로는 이미 때늦은 감이 있었다. 어떤 학술지를 펼쳐도 미디어, 스크린 미디어, 게임, 인터넷, 스마트폰과 같은 용어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다. 스마트폰 보급과 디지털 네이티브¹의 출현을 기점으로 하여 분명히 무언가가 변했고, 잘못되었고, 당시에도 옳지 않은 방향을 향하여 흘러가고 있었으나, ‘그래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에 관해서는 누구도 정확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악당에게게 구체적인 몽타주가 붙여지지 않으니 일각에서는 막연한 불신도 싹텄다. ADHD가 사회가 창조한 새로운 질병이라는 주장처럼 이러한 모든 변화가 단지 새로운 세계로 이행하며 겪는 멀미인 것처럼 해석되기도 했고, 거대한 흑막의 형태로 떠돌기도 했다. 『소셜 ..
가로로 두 칸, 세로로 네 칸으로 구성된 크고 튼튼한 흰 책장은 이사하며 모로 누워 훌륭한 TV장이 되어 주었다. 책장의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커다란 뿔을 가지처럼 펼친 사슴이 들어 있는 둥근 무드등과 손바닥만 한 크기로 재현된 모닥불이 있다. 그 위의 벽에 튀어나와 있는 보일러 조절 장치와 전등 스위치를 올라서면 매달의 날짜가 세로로 나열된 한 장짜리 달력이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다. 영화 기록만을 위한 달력이다. 날짜 옆에 제목을 적고, 날짜 위에는 장르마다 다른 색의 원형 스티커를 붙였다. 영화관 출입보다 집에서 영화를 트는 일이 더 잦은 최근에는 영화를 함께 본 사람에게 “이름 적어 줘.”하고 부탁하는 게 새로운 습관이자 취미가 되었다. 미루었다가는 2월 28일에 멈추어 버린 다이어리처럼 순식간에 잊..
복도는 충분히 어두웠다. 둥근 신발코의 앞을 어둠이 깨물고 있는 탓에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상아색이 되었을 신발이 새하얗게 보였다. 새까만 표백제가 훑고 지나간 것이 신발만은 아니어서, 양 팔꿈치를 괸 허벅지 아래로 보이는 유니폼도 유독 희었다. 육중한 문이 바닥의 시멘트를 긁는 소리와 함께 오렌지색 불빛이 복도로 새어 나왔다. 신발을 향해 기울어져 있던 고개가 위로 비스듬히 들어올려지던 순간, 똑같은 움직임으로 십여 명의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복도 양쪽의 벤치에 흡사 진열되듯이 앉아 있던 상태 그대로. 복도 맨 끝에 앉아서 고개를 돌리면, 아마 두 줄로 놓인 어깨와 뒤통수와 그림자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사람이라면 군집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규칙성을 찾아내는 버릇대로, 두 열로 놓인 집단 사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