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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어리고 조금 더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어 의심치 않던 시기에는 꿈이 자주 바뀌었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기도 했다가 알지 못해 모호한 분야의 석학이 되기도 했다가 원대하게는 다섯 번째 세계 성인이 되기도 했는데, 그 꿈과 꿈 사이에 개연성은 없었고 다만 커다랗다는 공통점만 있었다. 스스로의 신체에 관하여 키가 180 언저리까지 자라기만을 바라던 시절의 일이니, 몸도 마음도 크기에 골몰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한결같았던 셈이다.
자리 배정을 위해 키 순서대로 1번부터 끝 번호까지 교실 안에 일렬로 서는 일이 반복되면서 내 번호는 평균값과 작은 오차 범위를 가지게 되었고, 희망 직업도 비슷한 반경 안에서 머물게 되었다. 초등학교 교사, 중고등학교 교사, 교수, 다시 고등학교 교사. 책상 앞에 앉아 교과서의 활자와 교사의 목소리를 통해 새롭고 낯선 것을 빨아들이는 감각이 좋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던 것이 고작 한 문제나 개념을 통과하면서 단박에 이해되는 짜릿함이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지금의 내가 조금 전의 나와 같지 않음을 깨닫던 순간들을 여전히 기억한다. 하지만 비슷한 꿈을 꾸게 된 건 전적으로 생애 첫 초등학교 시절에 만난 L 선생님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함을 제외하고는 아주 단편적인 기억만 남았다. 교실 창틀에 놓여 있던 부레옥잠. 화장실 다녀오는 동안 잠깐 가지고 있어 줄래? 교실 창가 쪽의 ‘선생님 자리’에 놓인 의자에 앉으면 무릎에 올려지던 가죽 가방의 냄새. 목에 냉큼 걸었던 크로스 끈. 언제였지. 1학년이나 2학년 때였을 것이다. 선생님들도 얼마 없는 한적한 교무실 안으로 들어오던 오후의 느슨한 햇빛. 고작 여덟 살짜리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해 주시던 말씀.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단다. 쉽고 편한 길도 있고, 어렵고 힘든 길도 있지.
선생님은 ■■가 쉽고 편한 길을 걸어갔으면 좋겠어.
그 이야기 끝에 선생님은 내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반골의 상이 유리구슬 속 물결무늬처럼 어룽거리는 게 보였던 걸까. 쉽고 편한 길과 어렵고 힘든 길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었던 여덟 살짜리는 그 이후로도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운동권이나 시위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가정 내에서 이따금씩 듣게 된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당시 서울에서 크게 열렸던 집회에 절대로 참석해서는 안 된다는 주의를 받았으며,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담배라고는 손가락 사이에 끼워 본 적도 없는데 ‘나중에 네 모습을 생각하면 꼭, 방 안에서 꽁초가 이미 여러 개 쌓인 재떨이에 물고 있던 담배 비벼 끄면서 사회 문제에 관한 글 쓰고 있을 것 같아.’ 같은 이야기를 친구에게 들었다. 같이 있던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약간 낯부끄러웠다. 무언가를 해내거나 저지르고 나서 들은 이야기들이라면 기분이 조금 나았을까. 성인의 문턱 코앞에 이르러서는 교사나 교수나 강사의 범주 안에서 맴돌던 꿈마저 사라지고, 누가 희망 직업을 물으면 직업 이름 대신 “월 삼백만 원 이상이요.”라고 시큰둥하게 대답하곤 했으니 더 겸연쩍었을 것이다.
이따금 발각되곤 했던 반골反骨의 상은 사실 반만 맞았으니 나는 반반골半反骨인 셈이다. 아직도 전라도에 관한 지역감정이 만연하니 누가 부모님 출신지를 묻거들랑 경기도 출신이라고 대답하라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경기도에서 나고 자랐으면서도 누가 출신을 물으면 전라도의 딸을 자처해댔으며, 남교사가 구둣발로 학생을 걷어차는 게 문제시되지 않던 때 다리를 다친 학생을 가리켜 언급한 ‘다리 병신’ 소리에 교육부 홈페이지에 인권 침해와 명예 훼손을 포함하는 장황한 문장을 실었다가 그길로 교장실에 불려가기도 했고, 주의를 받았던 집회에는 사실 주위 친구들을 꼬드겨 함께 참석하고자 했다. 그랬으나, 불순응과 저항은 아주 협소한 범위 내에서 움직였다. 가족과 친구, 동경과 사랑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만.
자신의 이익 집단과 관련이 없거나 자신이 경험해 보지 않은 세계까지 정의로움이 미치기는 쉽지 않지요.
두 번째로 사랑하게 된 J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그게 내 뼈에 새겨진 어떤 나쁜 기질이 아니라 그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보호 본능 같은 정의로움이라는 것을 알았다. 작고 사적이며 보편적인 정의. L 선생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오래도록 교/강사/수의 꿈을 꾸어왔던 길에서 벗어나 J 선생님의 뒤를 쭐레쭐레 따라 걸으며 배우게 된 것은 그 정의를 한 뼘씩 늘려나가는 일이었다. 전체 사회, 다음 세대, 환경과 같은 것들. 월 평균 삼백 만원으로 규정되었던 꿈이 액수에서 직업으로, 직업에서 다시 구체적인 진술로 변하는 사이에는 기질을 지적받는 일보다 옹졸한 분노를 반성하는 일이 많아졌다. 모래와 바람과 먼지와 풀에게 내가 얼마만큼 작은지를 강박적으로 묻기보다 더 멀리, 넓게, 그리고 따뜻하게 보는 데 골몰하겠노라는 다짐을 하면서도 실천 앞에서는 자주 낯부끄러워진다. 그래도 테이블 위에 꽁초가 수북이 쌓인 재떨이 대신 두 차례 채운 커피가 바닥난 회색 머그잔을 내려놓으면서 사적인 이야기를 적는 어른이 되었으므로, 어쩌면 더 먼 미래에는 지금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어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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