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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로 두 칸, 세로로 네 칸으로 구성된 크고 튼튼한 흰 책장은 이사하며 모로 누워 훌륭한 TV장이 되어 주었다. 책장의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커다란 뿔을 가지처럼 펼친 사슴이 들어 있는 둥근 무드등과 손바닥만 한 크기로 재현된 모닥불이 있다. 그 위의 벽에 튀어나와 있는 보일러 조절 장치와 전등 스위치를 올라서면 매달의 날짜가 세로로 나열된 한 장짜리 달력이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다. 영화 기록만을 위한 달력이다. 날짜 옆에 제목을 적고, 날짜 위에는 장르마다 다른 색의 원형 스티커를 붙였다. 영화관 출입보다 집에서 영화를 트는 일이 더 잦은 최근에는 영화를 함께 본 사람에게 “이름 적어 줘.”하고 부탁하는 게 새로운 습관이자 취미가 되었다. 미루었다가는 2월 28일에 멈추어 버린 다이어리처럼 순식간에 잊힐 것을 알기 때문에, 요청은 영화가 끝나자마자 선언처럼 이루어진다.
이것은 달력에 적지 않은 영화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달력에 이름조차 적히지 못한 영화에 관한 글이다.
트위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추가한 계정이 얼마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쏟아지는 정보량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쌓이는 타임라인을 허둥지둥 쫓아가며 읽기 바쁘던 때, 영화 추천 글을 하나 봤다.
[리틀몬스터 진짜 골 때리는 영화다ㅋㅋㅋㅋ 루피타 뇽오가 호주서 사는 유치원 선생님인데 애들한테 우쿨렐레로 테일러 스위프트 노래도 불러주는 쏘 스윗 여성인데 하필 애들 현장실습 갔다가 좀비 습격을 받아서 아이들을 위한 좀비 슬레이어로 전직함ㅋㅋㅋㅋㅋ]
어떤 경로로 타임라인에 끼어들게 되었는지도 당시에는 확인하지 못한 채, 다만 글을 흥미진진하게 읽었고 다른 때와 다름없이 B에게 영화 제목을 적어 보냈다. 우리 다음에 이거 봐야 해. B와 나의 영화 취향은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르다. 여성 서사에 엄지를, 알탕 영화에 중지를 드는 버릇이나 액션 영화에 관한 선호와 최루성 감성 영화에 관한 불호는 유사한 영역이지만 그 안에서도 조금씩의 차이가 있다.
가령 B는 할머니와 관련된 이야기나 너무 슬프게 우는 사람을 보면 눈물을 쏟고 마는 반면 나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나오는 장면에서 코가 매워진다. 과연 지금도 눈물을 쏟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영화 『괴물』에서 정확한 사정이나 상황도 모르는 채 (그러면서도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데모하던 장면은 클로즈업 되기 보다 박해일 어깨 너머로 주로 잡혔던 것 같은데도 영화를 보며 최초로 많이 울었던 기억으로 남았다. 그 뒤로도 괴물을 한 차례 더 보았던 것 같은데 그때도 어김없이 울었다. 영화관에서 운 두 번째 기억은 『구름을 버서난 달처럼』에서 사지인 것을 알면서도 (또 나름대로 할 수 있는,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무언가를 하기 위하여) 민중들이 변변치 않은 무기를 들고 달려들던 순간이었고, 그다음은 『김복동』에서 시위하던 같은 성별의 학생들을 마주하던 때였으니 이만하면 송진 냄새가 눅진하게 난다고도 할 수 있겠다.
울음을 쏟는 포인트가 다른 것처럼 보지 못하는/않는 영화에도 다소 차이가 나는데, 몇 달 전부터 ‘여성 주연’을 내세워 시시때때로 영업해도 B는 『크롤』만큼은 절대로 보지 않겠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아 왔다. 반면 나는 『크롤』은 주야장천 밀어보면서도 B가 본 몇몇 영화는 엄두도 내지 않는데, 크롤을 제외하고는 B에 비하여 잔인함과 긴장감을 버텨 내는 역치가 낮기 때문이다. 호러/스릴러 장르에서 깔리는 의미심장한 배경음악은 듣기만 해도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는 것 같고, 이미 상상은 도래할 현실을 압도해버린다. 더 어렸을 적에는 꽤 잔인한 장면도 심드렁하게 봤던 것 같은데, 시간과 함께 자잘한 경험이 누적된 탓인지 잘린 살점 같은 걸 보고 있자면 내 몸도 같이 욱신거리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 역치에도 예외가 있는데, 주로 ‘여성 주연’에 ‘여성 희생자 없음’이 더해질 때다. 그때면 쿠션 뒤에 숨어서 잔인한 장면이 지속되고 있는지 아닌지를 B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늠하는 대신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가까이 앉아 “그거지!”를 외치게 된다. 코 밑을 막지는 않았으나 오마이걸 승희 못지않은 표정이리라. 모든 리액션에 있어 강도가 세고 결코 1절에서 멈추지 않는 B는 황소윤 뺨치는 바이브로 아랫입술을 깨물며 양손의 중지와 약지를 접기도 한다. 개틀링 건이나 양날 도끼 같은 크고 무거운 무기가 나오기라도 하는 날이면 B는 정수리부터 목덜미와 어깨까지를 (배경 음악의 유무와 관계 없이) 베이스와 기타 사운드가 강한 노래를 들을 때처럼 리드미컬하게 흔든다. 둘이 영화 보는 장면을 찍는다면 여자가 쏘고, 썰고, 휘두르는 장면이 재생 중인 화면을 콘서트 화면으로 바꾸어도 위화감 없이 그럴싸해 보일 것이다.
그랬으니 『리틀 몬스터』가 완벽한 실패가 될 줄은 B도, 나도 몰랐다. 골 때리는 영화인 것도 맞고, 루피타 뇽오가 호주에 사는 유치원 선생님인 것도 맞고, 애들한테 우쿨렐레로 테일러 스위프트 노래도 불러주는 쏘 스윗 여성인 것도 맞고, 하필 애들 현장실습 갔다가 좀비 습격을 받아서 아이들을 위한 좀비 슬레이어로 전직하는 것도 맞다. 맞는데, 문제는 그 빛나는 설정과 장면이 영화 전체에 있어 차지하는 비중에 있다.
영화를 틀자마자 나오리라 생각했던, 영화 포스터에서도 한가운데 위치하던 쏘 스윗 여성 대신 웬 여성 혐오에 찌든 남자 새끼가 나올 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리틀 선샤인 같은 유치원 선생님은 주인공이라는 것을 이후로도 백 번은 더 부정하고 싶은 그남이 ‘어떻게 한번 해보려는’ 대상으로 처음 등장한다. 초반 도입부에 여성 혐오가 많으니 건너뛰고 보는 게 좋겠다고 말씀해 주셨던, 같은 지역 페미니스트분의 트윗를 오만상을 쓴 B의 귓가에 황급히 밀어 넣으며 나는 믿었다. 원래 전직 전까지는 좀 힘들 수 있으니까. 전직하고 나면 니는 디졌다.
그리고 믿음은 무참히 깨진다.
혐오에 점철된 장면이 나올 때마다 B와 함께 ‘지금 남주 좀 죽여 주세요’를 믿밀었다가, ‘이번에는 저 새끼 죽어여야지’를 외쳤다가, ‘아, 이 새끼, 이거 안 죽을 것 같은데’와 함께 시무룩해졌다. 야구 규칙도 제대로 모르는 야알못이지만 야구 시즌 동안 수많은 짤로 쏟아져 나오는 야구 관람객들의 사진들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야구 극대노 스펙트럼의 끝에서 끝까지 영화 한 편으로 오갈 수 있었다.
그런 영화가 웃긴 영화로 소비되고, 심지어 포스터에는 [착한] 좀비 영화로 포장된다. 이런 영화에 착하다는 말을 쓰면 안 된다. 여성, 아동, 심지어 인종에 관한 혐오가 곳곳에 배어 있는 데다 심지어 ‘남아와 남주의 다정한 위로 없이는 불안감에 잠들지 못하는 섬세하고 유약한 여자아이’와 같은 교차점이 도처에 놓였다. 좀비 슬레이어로 전직하는 유치원 선생님을 빼면, 여성 혐오의 현신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두 남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권력형 성희롱을 포함한 여성 혐오가 필름에 덕지덕지 오물처럼 붙어 있다. 필름에서 정말로 선생님 없이 두 남성이 이야기하는 장면은 수식어를 붙일 필요조차 없이 최악으로 치닫는다.
“이게 코미디려면 여기서 둘 다 죽어야지.”
마지막 카타르시스마저 부정된 이후로 B와 나는 숙연해졌고, 영화는 급기야 잔여 시간이 5분 남은 노래방에서의 선곡처럼 구간 점프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B의 최근 영화 선택이 탁월했으므로(예: 클로즈, 퓨리) 나는 많이 미안해졌고, 미안한 이상으로 극대노 상태였으며, 눈치도 없이 로맨스를 암시하는 그 새끼의 (여자들만 아는^^;) 남자 눈깔이 등판함과 동시에 방구석 1열은 상영금지처분을 내렸다. B와 함께 보낸 시간 중 가장 뜨겁고 무거운 공기가 방 한가득 차올라서, 둘 다 한숨이 잦았다. B는 매트리스 위에 화를 이기지 못해 드러누웠고 나는 휴대전화를 쥔 채 모로 누웠다.
B는 “이거 레즈라이트에 써라.”라고 말했고, 나는 트위터 계정에 타래로 길게 작성한 영화 후기를 ‘(…전략…)영화 취향이야 사적인 문제지만 아냐시바취존하려고했지만취존불가다개빡쳐 얼마나 빡쳤냐면 올해 본 영화 중 #김봉곤 감이다. 김봉곤상 드림. 젊은작가수상집 읽었을 때보다 빡쳤으니 우수김봉곤상.’이라고 끝맺었음을 B에게 보여 주었다. 빅 혐오 몬스터를 튼 이후로 둘 다 인상을 찌푸리지 않고 웃기는 그게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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