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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중독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2016년 언저리였으나 당시에도 연구 주제로는 이미 때늦은 감이 있었다. 어떤 학술지를 펼쳐도 미디어, 스크린 미디어, 게임, 인터넷, 스마트폰과 같은 용어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다. 스마트폰 보급과 디지털 네이티브¹의 출현을 기점으로 하여 분명히 무언가가 변했고, 잘못되었고, 당시에도 옳지 않은 방향을 향하여 흘러가고 있었으나, ‘그래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에 관해서는 누구도 정확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악당에게게 구체적인 몽타주가 붙여지지 않으니 일각에서는 막연한 불신도 싹텄다. ADHD가 사회가 창조한 새로운 질병이라는 주장처럼 이러한 모든 변화가 단지 새로운 세계로 이행하며 겪는 멀미인 것처럼 해석되기도 했고, 거대한 흑막의 형태로 떠돌기도 했다. 『소셜 딜레마』에서 최초로 부정되는 것은 이러한 흑막이다. 동시에 무력한 선언이 다른 문장으로 되풀이된다. 이런 결과를 예상한 사람은 결코 없었다고.
악당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이러한 문제를 만들었는가. 쏟아져 나온 학술 연구는 그것에 관하여 대답하고자 하는 시도의 총체다. 디지털로 된 텍스트를 읽을 때 사용하는 뇌의 영역이 책을 읽을 때 사용하는 영역과 상이하다더라, 과잉 정보처리 과정에 길든 뇌가 평상시 정보처리에 있어 이러한 오류를 보이더라, 스마트폰 과의존에 속하는 사람의 경우 자존감이 낮고 이용 가능한 사회적 지지가 낮다더라……. 『소셜 딜레마』가 가장 처음 던지는 질문 역시 동일한 문제다. 무엇이 잘못인가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소셜 딜레마』에 출연한 업계 종사자들이 처음 보이는 반응은 한숨이나 망설임이다. 어렵네요. 복잡한 문제입니다. 설명하기 어렵거나 복잡하다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말이 많고 복잡하다는 부연이 곧바로 따라붙는다.
시대의 난제를 영화 『소셜 딜레마』가 다루는 방식은 거대한 두 텍스트의 교차다.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취한 하나에서는 종사자들이 자신이 자각한 소셜 미디어의 문제와 그 구조에 관하여 설명한다. 영화의 형식을 취한 나머지 하나에서는 한 가정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업계 종사자들이 무엇이 문제냐는 질문과 마주하고 있을 때, 영화 속에서는 소셜 미디어를 비판하는 뉴스가 쏟아진다. 소셜 미디어가 기본적으로 어떠한 상업적 구조를 취하고 있는지 소개되는 동안 다른 한 축에서는 가정의 구성원이 자연스럽게 소개된다. 어머니와 아버지, 장녀, 차남, 막내딸로 구성된 5인 가족. 이 가족 내에서 소셜 미디어의 사용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장녀가 유일하다.
어머니는 소셜 미디어 사용과 관련하여 문제 의식을 자각한 후 식사할 때 온 가족이 스마트폰 사용하지 않기를 제안하기도 하고, 아들에게 휴대전화 사용과 관련하여 일종의 거래를 제안하기도 하지만 그 자신도 소셜 미디어 사용에서 자유로운 인물은 아니다. 자식들의 대화 속에서 그가 생활 속에서 얼마나 긴밀하게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는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자식 세대와는 다른 유산이 있다. 어머니는 디지털 네이티브에 속하지 않는 세대다. 아날로그 세계에 속했던 시간이 디지털 세계에서 보낸 시간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길 것이다. 그는 이전의 세계를 기억한다. 문제라고 자각하는 순간 돌아볼 지점이 존재한다. 돌아본 지점이 현재와 얼마나 다른지 비교할 수 있다. 업계 종사자가 ‘주위를 보면 다 미친 것 같아요. 우리는 이게 정상인지 물어보아야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본질적으로는 그가 지닌 윤리 의식과 가치관에 기반하지만, 그가 겪었을 과거와도 유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그는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 같기 이전의 시대를 안다.
그러나 그런 유산이 존재하지 않는 이들에게 이 문제는 얼마나 더 가혹한가.
식사 도중 일어나 스마트폰이 들어 있는 보관 장치를 깨부수는 막내딸은 소셜 미디어에 가장 취약한 인물인 동시에 소셜 미디어가 아동, 특히 어린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단적으로 나타낸다. 그가 보관 장치를 끝내 부수고야 마는 것은 그가 가진 폭력성이나 충동성, 아동으로서 지닌 미숙함 때문이 아니다. 가족 구성원 내에서 소셜 미디어 사용 기간의 절대적인 총량은 그가 가장 많지 않을 수 있지만, 전체 삶 중에 소셜 미디어로부터 영향을 받은 기간의 비율을 계산한다면 그가 가장 높을 것이다. 소셜 미디어가 정체감과 자존감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 인정을 추구하게 하는가, 그 과정에서 ‘소셜 미디어 네이티브 세대’가 어떻게 취약해지는가. 이 모든 질문이 그의 행동을 통하여 드러난다.
출현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은 아버지에게서 유추할 수 있었던 문제인 ‘정치적 분극화’는 차남의 일화에서 ‘가짜 뉴스’ 문제와 함께 반복된다. 딸이 소셜 미디어가 한 개인(과 세대)의 심리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나타낸다면, 아들은 소셜 미디어가 한 개인(과 세대)가 사회를 인지하는 방식에 어떻게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 준다. 영화 내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극 중도파’라는 개념은 낯설게 느껴지지만 ‘코로나19 음모론’은 낯선 예시가 아니다. ‘태극기 부대’로 대표되는 국내 극우 집단 내에서도 “부동산 정책 실패를 덮기 위해 정부가 정치적 계산으로 바이러스 위기를 조작하고 있다”, “광화문 집회에 다녀왔다고 검사받으면 100% 코로나 양성 판정이 나온다”라는 이야기가 빠르게 소비된 바 있다. 이해할 수 있는 예시가 있다는 말은 위협이 저 먼 국경 너머에 있는 대신 국경을 초월하여 지금 여기에도 존재한다는 증거다.
딸과 아들의 이야기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영화 내에서 직접적으로 다시 한번 언급된다. 우리는 자아와 신념에 대한 통제력을 점점 상실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가 발생하는 원인은 소셜 미디어의 사용자 개개인이 나약하거나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선물로 거래되는 대규모 시장이 사용자에게 세계와 진실을 ‘사용자 맞춤’으로 제공하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로 인한 개인의 행동과 인식의 변화는 사용자 개인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소셜 미디어라는 시장 내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생산해내고 있는 상품이다. 사용자(User)로써의 지위는 어느새 전복된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도구란 손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써 목적에 적합하게 사용되는 동안에는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했다. 손을, 그리고 손과 발이 위치한 사회 구조를 손조차 모르게 바꾸고 있던 것을 도구라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사용한 것이 아니라 사용되었다.
27억개의 트루먼쇼라는 디스토피아를 선언하면서도 영화는 맨 마지막에 상자 밑바닥에 남아 있는 한 줌의 희망을 비춘다. 전통적인 구성이다. 태초에는 세상에 긍정성과 사랑을 퍼뜨리기 위하여 고안되었다는 페이스북의 좋아요 버튼은 기술 그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사회의 어두운 면을 끌어내는 기술의 능력과, 그 능력이 이끌어오는 사회의 어두운 면 자체가 실질적인 위험으로 선언된다. 기술의 부작용으로부터 인간과 문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어떤 개선과 규제를 취할 수 있을지, 소셜 미디어로부터 ‘거리 두기’를 하기 위하여 업계 종사자들이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다음 세대와는 어떠한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지도 크레딧과 함께 상냥한 부록으로 제시된다. 그러니 우리도 희망을 잃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고.
기술자들조차 이 기술을 통제할 수 없으며, 감시자본주의에 기반한 기술과 인공 지능이 앞으로도 발전과 침투를 거듭할 것이며, 문명의 몰락과 내전이 머지 않았다는 말 뒤에 따라오는 말 치고는 지나치게 낙관적이게 들리는 면이 있다. 아마 자신은 낙관론자인 것 같다고 말하며 수줍게 웃는 여성의 말이 이유 없이 삽입되진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할 것이다. 그래야 집단적 의지가 형성되고, 구조를 만들어낸 손을 향하여 이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으므로. 사회 구조를 단숨에 허물어 새로 쌓을 수 없다면 그러한 사회 속에서 어떻게 생존할 것인지를 도모하는 게 필요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자아와 신념에 관한 통제력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소셜 딜레마』가 제시한 문제에 여성 문제를 씨실과 날실처럼 엮으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막내딸의 이야기에서 딸이 인식하는 타인의 평가는 외모를 중심으로 하지만 우리는 여성으로써 어린 시절부터 마주하는 타인의 평가나 사회의 시선이 단지 살갗 위에 그치지 않음을 안다. ‘대담함, 용기, 모험, 도전과 같은 단어가 여자 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회 인식’²과 이러한 인식 구조를 그대로 답습한 미디어, 소셜 미디어에서 끝없이 재생산되는 아이돌 산업, 끝없이 전시된 코르셋과 성상품화, 트렌스젠더리즘, 자해(절단, 문신, 피어싱) 문화³, 무해한 음모로 위장한 이성애 도식……. 소셜 미디어를 통해 27억개의 트루먼쇼 중 다수의 트루먼쇼를 손 안에서 관찰 가능하게 된 세상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부장을 만나는가. 유산 없이 태어난 자매가 만날 27억명의 가부장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빨간 약을 내밀 수 있을까.
매트릭스가 매트릭스인 줄 모르는데 어떻게 깨어나지요?
여성으로 패싱되는 MTF 트렌스젠더를 제외하고 어떻게 여성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냐던 자매는 스스로를 가리켜 비시스젠더 논바이너리 수험생이라고 했다. 여성으로 패싱되거나 불리길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여성으로 패싱될(까 과연) 비여성의 배제에 관한 분노와 우려가 자신의 배제보다 앞서기까지, 여성으로 분류되는 것에 진저리를 치기까지 자매가 걸어온 길을 생각하다가 영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연석 같은 소리라도 별 수 없지만, 마음이 아팠다. 여러 책의 문장들을 반듯하게 잘라다가 콜라주 같은 편지를 길게 적어서 부치면 닿을 수 있을까. 아마 닿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긴 시간을 들여 적을 것이다. 적어야 할 것이다.
¹ 디지털 환경을 태어나면서부터 생활처럼 사용하는 세대. 보통 1996년생 이후 출생자.
² 이민경, 잃어버린 임금을 찾아서. 봄알람.
³ 쉴라 제프리스, 래디컬 페미니즘. 열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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