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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는 충분히 어두웠다. 둥근 신발코의 앞을 어둠이 깨물고 있는 탓에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상아색이 되었을 신발이 새하얗게 보였다. 새까만 표백제가 훑고 지나간 것이 신발만은 아니어서, 양 팔꿈치를 괸 허벅지 아래로 보이는 유니폼도 유독 희었다. 육중한 문이 바닥의 시멘트를 긁는 소리와 함께 오렌지색 불빛이 복도로 새어 나왔다. 신발을 향해 기울어져 있던 고개가 위로 비스듬히 들어올려지던 순간, 똑같은 움직임으로 십여 명의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복도 양쪽의 벤치에 흡사 진열되듯이 앉아 있던 상태 그대로. 복도 맨 끝에 앉아서 고개를 돌리면, 아마 두 줄로 놓인 어깨와 뒤통수와 그림자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사람이라면 군집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규칙성을 찾아내는 버릇대로, 두 열로 놓인 집단 사이에서 유독 혼자 작은 어깨와 뒤통수와 그림자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야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남들보다 두 사이즈 정도는 작아 보이는 유니폼에 적힌 이름을 보지 않고서도.
JOO SOO IN
그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작년 겨울의 일입니다. 십이 월이었고, 코엑스에서는 서울 일러스트 페어가 열린 날이었습니다. 나이 차이가 나는 동생들과도 ‘친구’로 만난 경우에는 말을 놓곤 하는데, 그 중에서도 두 살 차이가 나는 E는 대개 이름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곤 하는 어린 친구들과 달리 이름 두 글자를 다정하게 불러주곤 합니다. 다정하게 제 이름을 부르며 제가 좋아하리라는 생각이 들어 서울 일러스트 페어에 같이 가고 싶었다는 말에 저는 마찬가지로 E가 좋아하리라는 생각에 코엑스 상상마당에서 열리는 인디 영화 결산을 신청했습니다. 함께 보지는 못했지만 ‘벌새’, ‘메기’, ‘윤희에게’를 둘 다 너무나 푹 빠져 보았던 데다가 여성 평론가 분께서 진행하시는 프로그램이라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거든요.
오전은 코엑스, 오후는 홍대로 이어지는 서울 횡단 코스에서 둘 다 예상보다 빠르게 지치고, 빠르게 지쳤다는 점에 놀라고, 서로가 놀랐다는 사실에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날 E에게 무엇이 가장 오래 남았는지는 E에게 물어보지 않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게는, 평소에는 무던한 편이면서도 좋아하는 것 앞에서는 한없이 설레어 하고 수줍어 하는 E의 얼굴과 주수인 이름 세 글자가 남았습니다.
그날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영화로 열 편의 영화가 선정되어 있었는데 그 영화 중에는 야구소녀가 없었습니다. 주수인의 이름이 언급된 건 이야기를 거의 다 마친 후 강의를 들으며 궁금해지거나 흥미로워진 것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어요. 그럼 2020년에 개봉하기를 가장 기대하시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누군가가 물었고, 망설임 없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야구소녀’요. 당시에는 정식 개봉 전이었으므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보았던 제목이 야구소녀였는지 베이스볼 걸이었는지 잠시 헷갈려하셨던 것도 같습니다. 제목이 처음 언급되었을 때는 그렇게 오래 기억에 남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같아요. ‘소녀’라는 단어에는-소위 박찬욱 감독이 ‘아가씨’를 가리켜 퇴색된 단어의 본래 의미를 회복하고 싶었다는 논조로 이야기했던 것처럼-사회적인 편견과 선입견이 동시에 떠오르곤 하니까요. 대개 ‘소녀’라는 단어가 붙으면……. 다들 아시잖아요, 그쵸.
영화를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평론가 분께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간략하게 옮겨 적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나오는 장면이 있다. 입단을 위해 여러 선수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동시에 여러 명의 선수가 앵글 안에 잡힐 때 보면 인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체급의 차이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장면만으로도, 보는데 갑자기 코가 찡하고 울컥하는 게 있었다. 우리는 모두 다 아니까. 남자가 주류인 집단 안에서 저 사람이 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을지 상상력을 발휘하고자 애쓰지 않아도 아니까. 얼마나 많은 역경과 차별을 딛고 현재에 이르렀을지 설명하지 않아도, 그 선수들 사이에 있는 이주영 배우의 모습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날부터 저는 첫 문단에 적었던 장면을 본 것처럼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알 수 있으실 거예요. 영화 속에서 나오는, 평론가 분에 의하여 소개되었던 장면은 제가 첫 문단에 적었던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코로나 시대를 맞게 되면서 더 먼 곳에 살고 있는 E와 보는 대신, B와 함께 영화를 보며 저는 틀린 그림 찾기를 하기에는 전부가 오답일 정도로 다른 장면이라 속으로 멋쩍어하며 남들보다 한번 더 웃었습니다.
이 영화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준 사람은 함께 본 B와 레즈라이트의 이카고 님, 그리고 한참 앞서 영화를 보았던 평론가 분, 이렇게 세 분입니다. B와 저는 같은 대목에서 영화관에 나란히 앉아 주먹을 쥐었고, 같은 대목에서 많이 웃었습니다. 기생충 같은…… 아니, 그래도 기생충은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나름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점에서 허수애비가 더 적절하겠습니다. 허수애비로 등장하(지만 딸의 꿈만큼은 응원’만’하)는 아버지와 현실과 타협해 꿈을 쫓는 장녀에게 현실 직시로 포장된 후려치기를 일삼는 어머니의 역할이 얼마나 구닥다리 같은 설정인지는 ‘소녀’에 따개비처럼 붙어 있는 부정적인 의미들과 마찬가지로 부연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무심한 척 하면서도 실은 다정하고, 나름의 사정과 상처를 가지고 있다가 모종의 과정을 거쳐 동질감을 느끼고는 주인공의 성장을 돕는 남성 멘토의 역할도 참 지루하죠. 필름에서 오려다가 다른 영화에 붙여도 전혀 모를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붙여 넣을 수 있는 영화들을 가만 생각해 보면, 주인공이 여성이었던가요. 그것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유아인, 이제훈, 강하늘. 연령대가 조금 더 높아지면 일단 하정우 이름부터 떠오릅니다. 청춘의 이름은 언제나 남자였고, 특히 거기에 땀냄새가 섞이기 시작하면 엔딩 크레딧에서 여자의 흔적조차 찾기가 요원해집니다. 땀에 푹 젖은 앞머리, 꿈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 자신의 젊음과 건강에 대한 믿음이 지나쳐 다소 무모하다 싶은 수준의 연습으로 몰아세워지는 몸, 건드릴 때마다 흙먼지가 툭툭 흩어지는 옷가지, 같은 운동을 오래 해 온 (하지만 친하지는 않은) 동료와의 시기, 그리고 그 시기를 끝내 극복하게 하는 전우애. 그걸 주수인이 해냅니다.
영화를 소개하던 이야기 말미에 평론가 분이 말하길 이 영화의 홍보를 맡는다면 ‘주수인티콘’을 만들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만큼 여러 종류의 감정을 보여 주는 영화라고요. 알 것 같았습니다. 재능과 불운을 동시에 갖추어 반항과 우수에 찬 야구선수의 눈빛에서부터 점차 여러 종류의 감정들이 세밀한 형태로 이주영 배우 얼굴에 스칩니다. 그중에서도 구단으로부터 제의를 받게되는 장면을 언급하고 싶으나 마찬가지로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들을 위하여 생략합니다.
남성 인물들로 인하여 부족함이 많은 영화지만, 엄마의 역할에 관하여서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극중 어머니의 역할과 관련하여서는 그 역시 피해자였음을, 딸 경기 한 번 보러 간 적이 있냐는 허수애비의 힐난과(왜겠냐?)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상황에 딸을 밀어넣고서도 의기양양해하기는 커녕 딸의 모습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자리에서 물러나는 장면에서 읽을 수 있었으므로 연민의 감정이 더 많이 듭니다.
단점이 많은 영화지만 남성+청춘+운동+꿈의 조합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는 단점이 적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여성 주연과 같은 점에서 가산점을 주지 않을 수 없는 영화입니다. 어떤 것을 어떻게 소비하는지는 개개인이 선택할 일이지만, 주연이 여성이면 여전히 투자를 받기 어려우며 그리하여 때때로 본래 여성으로 내정되었던 등장인물의 성별이 영화 제작 과정에서 비-여성으로 수정되곤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점에서 저는 상상 가능한 불편함 때문에 외면하시기보다는 추라이, 추라이를 외쳐보고 싶습니다. 걸캅스 때와 마찬가지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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