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날이 흐리다. 네가 있는 곳은 어떨지 모르겠어. 수요일은 중간에 잠깐 시간이 나는 날이라 내일 해야 할 문서 작업을 당겨서 하려고 앉았는데, 작업에 들어서기에 앞서 연 빈 화면을 보고 있자니 네게 편지를 한 통 쓰고 싶더라. 최근에 나는 글쓰기 모임에서 주 3회, 석 달째 글을 쓰고 있어. 이번 달 초입에는 주 세 번 소설을 써서 한 달짜리 소설을 완성해보는 건 어떨까, 세 번 중 한 번은 수필 한 번은 시 한 번은 편지를 적으면 어떨까 고민을 했어. 했던 고민이 무색하게 지금까지 쓴 일곱 개의 글 중 네 개가 편지가 되었고, 편지들을 쓰며 나는 언젠가 네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어. 생각이라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이 될까. 직감했다기에는 지나치게 우연에 기대는 것 같고 생각했다기에는 뿌옇게 들린다. 내가 조만간 네게 편지를 쓰겠구나. 그래야겠다. 그렇게 생각했어.
이민경 작가님이 보내주시던 편지가 마지막으로 발송되던 달, 나는 몸에서 뻗어내는 글쓰기 강연을 들었고 너는 작가님이 오신다던 캠프를 갈까 고민 중이었지. MBTI를 어떻게 적어낼까 하다가 E로 적었다간 가서 비트박스 하게 되면 어쩌냐는 친구 말에 I로 적었다던 기억이 난다. 캠프 잘 다녀왔니? 캠프 직전 날까지 흐렸다가 캠프 당일에는 조금 갠 것 같았는데. 캠프 다녀온 사람들이 올려 준 후기를 들으며 나는 내가 들을 수 없는 후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면서도 묻기에는 그것이 적절한지를 한참 되뇌게 되어서 이렇게나마 뒤늦게 물어. 그날 네가 보고 듣고 겪었던 모든 것들이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힘이 되기를 바라면서.
마찬가지로 아주 늦게 하는 말이지만 실은 네가 신청했던 캠프에 나도 신청서를 넣었어. 오랜만에 가정통신문 받아보니 기분이 이상하더라. 아닌 걸 알면서도 꼭 학기 초에 아직은 서먹서먹한 친구들이랑 같이 소풍을 앞둔 것 같았어. 소풍이나 기대되는 일이 있으면 쉽게 잠들지 못하던 습관 그대로 캠프 당일에도 새벽녘까지 깨어 있다가, 코로나 19 소식을 들으며 나는 같이 가기로 했던 친구와 함께 불참하지 않기로 했어. 조원들에게 알리고, 마니또에게 전해주려던 편지를 사진으로 조장에게 전하고, 그러고 나서 조금 울다가 잠들었던가. 친구가 있어 오래 울지는 않았는데 스스로 내린 결정임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오래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더라.
그날 캠프에 갔더라면 마주쳤을까, 우리?
참여 인원이 백 명이 넘었으니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하여 가정하고 추측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마는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한다. 네 안부를 묻고 싶어지거나 네게 전해주고 싶은 게 생길 때면 잠깐 네 생각을 하게 되고, 네 생각을 하다 보면 그런 부질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빗금을 그어. 캠프에 신청서를 넣은 후로 캠프 당일이 되기까지 해보지 않은 생각이 아니라서 그런가 봐. 캠프에 신청서를 넣었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알 수가 없었고, 우리 둘 다 머리카락이 길 때 만났으니 마스크를 착용한 채 서로를 못 알아볼 수도 있으리라 짐작하면서도 너와 마주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어. 이렇게 말하면 고민 끝에 무슨 정답을 골랐는지 물어볼 것 같다. 너는 자주 물었고 나는 그때마다 최대한 성실하게 대답하곤 했습니까. 그런데 사실 이번에는…… 정답을 못 골랐어. 뭘 골라도 자꾸만 백지가 되어버려서 캠프 당일까지도 공란으로 비워둔 채였거든. 현실로 전환되지 않았으니 이제는 영영 백지 답안으로 남겨두려 해.
캠프에서 이민경 작가님이 하신 강연이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네가 고민하던 문제들은 이제 좀 해결이 되었을까? 누가 선뜻 답을 내려 줄 수도 없는 문제고 누가 답을 내려준다고 한들 네 몸에서부터 뻗어내는 답을 적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할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복잡해 보였던 기억이 나서 묻게 돼. 나는 그때에도 나름의 최선을 다해 구구절절한 서술형 답안을 적어 네게 보냈지만 그 후 몸글 강연을 듣고 『어머니의 나라』를 읽고 나니 아주 잘못된 답안을 적어 보냈구나 싶어 조금 멋쩍었어. 내가 정답을 알려 주길 기대한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처음 선물했던 책, 혹시 읽었을까? 그때는 그 책을 읽으며 사랑에 관하여 아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만 같았는데, 코로나 시대의 사랑과 『어머니의 나라』를 읽은 후로는 눈앞이 또 조금 달라진 것 같아. 몸에 완전히 체득되기 전까지는 또 아주 다른 시각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이전과는 다른 질문과 고민을 떠올리게 되더라. 나는 이따금 내가 이성애적 도식에서 아주 벗어나지 못했던 건 아닌지를 자문해. 어떤 순간에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순간은 이성애적 도식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순간으로 반짝이기도 하고……. 기억이 조금 더 세밀하고 선명하다면 좋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
레퍼런스 없는 사랑 앞에서 조금 덜 헤맸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것도 아쉽고. 사랑의 순간은 언제나 같지 않아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항상 최초의 일이 되겠지만, 그래도 주장해보자면 너를 사랑하는 일은 내게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 언제나 생경했어. 네가 던지던 질문들에 성실하게 대답하며 활자가 담긴 말풍선을 쏘아 올리던 밤과, 소풍 가던 날 못지않게 설레서 잠들지 못하다가 너를 만나러 가던 기차에서 까무룩 잠들던 이른 아침을 아직도 기억해. 내가 쥐고 있는 것들은 그때의 나처럼 조금 들떠 있고, 내가 네 손을 잡고 이끌던 홍대 인근이나 네가 내 손을 잡고 이끌어주던 야시장의 풍경을 닮았는데. 네가 손에 쥐고 있는 기억 속의 나는 어딘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기차에 담겨 있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오래 아팠어. 네가 내게 미움을 산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는 말에 나는 네가 보낸 시간을 천천히 헤아리면서 오래 울고 싶었어.
너를 만나러 가기 위해 가던 기차역과 훨씬 가까운 곳에 살게 되면서 나는 이따금 너를 불러다가 밥을 짓고 커피를 내려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 터무니없지.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네 안부를 묻고 싶고, 따뜻한 것으로 네 속을 채워주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런 생각을 실천하는 대신 가만히 들여다봐.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머물러 달라던, 하지만 친구가 되자는 소리는 아니라던 네 말에 같은 마음은 아니지만 여기에 머물겠다고 했던 스스로의 대답도 함께 곱씹으면서. 여전히 나는 이게 부정적인 의미의 여지나 희망이 될까 고민하고, 그래서 끝내 솔직하게 전하기를 포기하지만 전하지 않을 편지에는 조금 더 솔직해도 되지 않을까. 코로나가 네가 있는 지역을 휩쓸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나는 항상 너를 염려해. 네가 힘들지 않기를 바라고, 힘든 순간들을 버텨낼 수 있기를 바라며, 그 순간들을 딛고 앞으로 달려가길 바라.
내가 네게 항상 사랑이라던 네 말마따나 너 역시 내게 항상 사랑의 이름일 거야.
잘 지내길 바라.
'내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년 4월, 한 시간 쓰기 4기에 참여하신 ■■■께 (0) | 2021.04.12 |
---|---|
2020년 10월, J에게 (0) | 2021.03.08 |
2020년 9월, 동생들에게 (0) | 2021.03.08 |
2020년 8월, 레즈라이트 이카고 님께 (0) | 2021.03.08 |
2020년 7월, H 언니에게 (0) | 2021.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