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지난 이야기(2020)

혼자서 집에 가는 길

칠월[JULY] 2021. 2. 22. 22:44

불빛이 드문 시골일수록 밤은 이르게 찾아오고 아스팔트는 한층 새까맣게 보인다. 안개가 짙게 끼거나 빗줄기가 쏟아진 날에는 버스의 헤드라이트 아래로 밀려왔다가 차체 아래로 미끄러져 사라지는 도로에 윤기마저 돈다. 그럴 때면 한낮의 풍경 속에서 보았던 아스팔트의 미세한 굴곡이 쉽게 잊히고, 타이어 아래에서는 검은 파도가 소리 없이 연속한다.

 

버스 안에는 1인석이 없다. 운전석 뒤부터 나란히 놓인 2인석은 줄 맞춰 세워놓은 책상을 닮았다. 버스 뒷문과 가장 가까이 놓인 좌석에는 고등학생 둘이 나란히 앉아 있다. 교실 안에서도 저렇게 앉아있을까. 두 사람의 어깨는 책상이나 버스 좌석처럼 앞을 향하여 가지런한 직선을 그리는 대신,  서로가 서로를 향해 몸을 틀어 앉은 탓에 어깨는 비스듬한 둔각을 이룬다. …잖아, 그치. 이야기 소리는 작고 규칙적인 버스 엔진 소리 사이에 곧잘 파묻힌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소리를 서로는 놓치지 않아서 말과 말 사이에는 웃음소리가 탄산 거품처럼 자주 터진다. 서로의 어깨를 더 가까이 기울이면서.

 

시야의 가장자리에서 이따금 움직이는 교복 치맛자락은 이 동네에서는 유일하게 무늬 없이 어두운색이라서, 색만으로도 오래전 장롱으로 들어간 것과 같은 옷임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이제는 장롱 한구석에서조차 밀려나, 투명한 압축팩에 담긴 채 창고 깊은 곳에 놓여 있거나 수거함에 버려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프탈렌의 새하얀 냄새가 진하게 밴 교복 재킷을 펼쳐 들면서 “엄마, 이거 아직도 안 버렸어?”했던 것도 벌써 수년 전의 일이다. 엄마가 그때 뭐라고 대답했더라. 

 

“그건 남겨둬야지”였는지 “하나씩은 둔다니까” 였는지는 모호하지만 아마 그런 종류의 대답이었을 것이다.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얌전히 받쳐 들고 돌아오기보다 친구와 물웅덩이를 세게 밟거나 걷어차 누가 더 서로를 골려줄 수 있을지 골몰하던 딸내미 습관을 알아서인지, 비 오는 날에는 그렇게 개구지게 놀면서도 평소에는 ‘깔끔이란 깔끔은 다 떠는’ 습성을 잘 알아서인지, 옷장 안에 여러 벌 놓여 있던 교복들은 필요성이 다 사라지고 나서도 하나씩은 남겨졌다. 옷장 맨 위 칸의 보자기 속에 남겨진 배냇저고리들처럼.

 

하나씩 남은 배냇저고리, 하나씩 남은 교복. 엄마는 거기에 뭘 남겨두고 싶었을까. 채 빠지지 못한 빗물이 아스팔트 위에서 개울처럼 흐르던 날이나 리본 매는 게 서툰 친구의 리본을 대신 매어주며 실없이 터뜨리던 웃음은 아닐 것이다. 교복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기숙사 이층 침대의 비좁은 매트리스에 둘이 누워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쏟아내던 오후나, 남자친구와 헤어져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던 친구를 위해 일 층 침대에 누우면 보이는 이 층 매트리스의 새까만 바닥에 야광별을 붙이던 새벽도 아닐 것이다. 혼자서는 어디도 못 가는 줄 알았던 엄마가 혼자 고속버스를 끊어 강릉에 가서는 한참이나 파도가 일렁이는 것을 보다가 돌아왔다던, 엄마의 시간을 딸 셋 중 누구도 알지 못했던 것처럼.

 

버스 바퀴가 오른쪽으로 기울며 불룩한 에코백 위에 올려져 있던 작은 꽃다발이 바스락거렸다. 지하철역 안에서 오래 비어 있던 상가가 꽃집으로 변한 걸 본 날부터 사랑하는 여자들에게,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여자인 엄마에게 꼭 꽃 한 송이를 사주고 싶었다는 말은 아마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엄마가 꽃 선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넨 꽃을 좋아해 주시리라는 것을 더 확실하게 안다. 꽃을 먼저 드릴까, 동네 서점에서 오래 고민하며 고른 책 두 권을 먼저 드릴까. 고민하는 사이에도 전조등 아래로는 새까만 물결이 계속해서 밀려들고, 귓바퀴에는 가벼운 웃음소리가 자꾸만 부딪혀 흩어지고, 버스 벨은 점멸을 반복한다. 꽃과 꼭 같은 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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