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놀라 홈즈 : Break out of the shell
『에놀라 홈즈』는 추리물이며 모험담인 동시에 성장기다. 『셜록 홈즈』의 문법에 익숙한 관객들이 ‘추리 영화치고 아쉽다’는 평가를 매긴 것은 이 차이에 상당수 기인할 것이다.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셜록은 이미 완성된 상태로 등장한다. 그는 성인이며, 사용하는 논리와 기술에 능수능란하다. 그러나 에놀라 홈즈는 생물학적으로 열여섯 살 생일을 맞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사회적으로는 고향을 벗어나 본 적 없던 자다. 영화는 ‘어머니 찾기’라는 목적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어머니와 단 둘뿐이던 세상에서 벗어나는, ‘어머니로부터 떨어지기(Break)’ 과정으로 움직인다. 다시 말하자면 영화는 하나의 여성으로써 독립하기 위하여 에놀라가 알을 깨고(Break out of the shell) 나오는 여정이다.
따라서 관객이 기대하는 바, 즉 셜록 홈즈를 능가하는 여성 탐정의 활약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후속작이 당연히 나와야만 하는 영화기도 하다. 알을 깨고 나온 탐정이 무엇을 추적하고, 논파하며, 성취할 것인가. 셜록보다 어리고 뛰어난 여동생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기 위해서든 『에놀라 홈즈』가 ‘추리물로는 약하다’는 평가를 뒤집기 위해서든 후속작 분명 나올 필요가 있다. 그러나 감독은 현재의 감독이 아니어야 한다. 설령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다음 편에서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남성에게 이러한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지는 않지만, 『에놀라 홈즈』라는 거대한 여성 서사의 감독을 맡기 위해서라면 그 역시 알을 깨고 나올 필요가 있다.
영화에서 중요하게 사용된, 그리하여 영화를 대표할 수 있을 하나의 낱말을 고르자면 BREAK다. 둘을 고르자면 BREAK와 FINISH를 고를 수 있겠다. 빈도로만 따지면 Be나 Have 동사가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었을 테지만, 앞서 언급한 두 동사는 에놀라를 중심으로 상반된 의미를 형성하며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동사다. 『에놀라 홈즈』는 에놀라가 신부교육 학교(Finishing school)로부터 벗어나 사회적 규정에 저항하며(“I’m not finished yet!”), 여성 탐정으로 완성되는(finish) 영화다. 마이크로프트는 에놀라를 가리켜 천방지축(unbroken) 상태로, 교정(break)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영화에서 깨지는(break)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그러한 성차별적 고정관념이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는 깬다. 추리물에 관한 기대야 앞서 언급했으니 차치하더라도 분명 깨는 지점들이 있다. 항목에 포함된 요소들은 배열 순서에 무관하게 동일하지만, 배열 순서는 뉘앙스에 분명한 차이를 가져온다. 깼음에도 불구하고 깨는 영화인가, 깨는 영화지만 깨낸 영화인가에는 차이가 있다. 나열의 순서를 고심하다가 전자를 택하기로 한다. 영화가 무엇을 깼는지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다음으로는 영화가 깨지 못한 것 (혹은 깨지 않아야 했는데 깨버린 것)을 살펴볼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영화가 깼다고 평가되지만 실제로는 깨지 않은 것에 관하여 논하고자 한다.
영화가 깨부순 것
가장 두드러지는 건 성차별적 고정관념이다. 영화에서 등장인물이 최초로 그려지는 순간에 포함되는 요소들은 해당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특성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능숙하진 않더라도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에놀라와 달리, 후작은 객실 열차 선반의 가방 안에 얌전히 담긴 채로 등장한다. 가방에서 탈출한 후로도 동적인 움직임은 에놀라에게서 두드러지며 후작은 수동적으로 에놀라의 움직임을 따르거나 에놀라의 움직임에 수반된다. 캐릭터의 활동성뿐만 아니라 대사와 역할에서도 성별 고정관념은 계속해서 부서진다. 에놀라는 후작에게 “너 나 믿지?”라고 묻고, 후작은 기차에서 떨어진 후 ‘단추가 떨어졌다’고 징징댄다. 에놀라에게 칼 가는 법을 알려준 것은 에놀라의 어머니이고, 꽃과 허브 그리고 식용식물을 후작에게 알려준 것은 후작의 아버지다. (그리고 대부분의 서사와 달리 이 영화에서 성인 남성은 잘 허망하게 사망한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혈육의 생명을 자신의 손으로 거두는 역할 역시 건장한 성인 남성 대신 노년 여성에게 부여된다. 심지어 그가 든 도구란 소위 알탕 영화에서 여성에게 선심 쓰듯이 할당해 주는 조막만한 권총이 아니라 산탄총이며, 그는 그 무기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한밤중의 어둠에 푸르게 물든 홀에서 조준과 격발로 이어지는 그의 움직임은 재빠르고 목표한 지점을 정확하게 꿰뚫는다. 브누아 필리퐁의 『루거 총을 든 할머니』 이미지를 환기하기도 하는데, 자신의 안녕과 신념을 위하여 방아쇠를 당기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 할머니는 유사성을 지닌다.
영화에서 산산이 깨지는 두 번째 대상은 셜록 홈즈의 위상이다. 셜록이 영화에서 최초에 등장하는 순간에 에놀라는 셜록의 이름에 나붙는 주석들을 길게 병렬적으로 나열한다. 에놀라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유명한 탐정이자 학자이면서 화학자이고 바이올린 연주의 거장이며 사격의 명수이자 검객이면서 목검술의 달인이고 권투 선수이며 또한 연역적 추론의 귀재다. 천재 오빠를 설명하는 에놀라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으며 자부심으로 빛난다. 그러나 바로 다음의 장면에서 그 천재 오빠는 여동생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 채 지나친다. 자전거를 타는 에놀라의 첫 등장이 에놀라의 캐릭터를 요약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셜록의 위상이 추락할 것은 이 대목에서 이미 예고된다.
에놀라는 그의 이름을 불러 세우고, 자신에게 전보를 보냈음을 상기하고, 전보 내에서 여기에서 만나자고 했다고 이야기한다. 왜 에놀라는 셜록과 마이크로프트를 곧바로 ‘오빠’라고 부르거나 ‘저 에놀라예요’라고 자신을 소개하지 않는가. 에놀라가 말한 내용들은 일종의 단서다. 더 어려운 단계의 단서(‘홈즈 씨’)에서부터 점차 쉬운 단계의 단서로 제공된다(전보 사실→전보의 구체적 내용). 그러나 셜록은 에놀라의 이름을 곧바로 부르는 대신 마이크로프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이 지점에서 에놀라의 다섯 번째 설명이 급히 따라붙는다. 오빠들은 아주 오랫동안 저를 만나지 않았어요. 에놀라의 표정은 천재 오빠를 소개하던 때와 다르며 이 설명은 간단한 추리조차 실패한 셜록을 위한 변호라고 해도 무방하다.
극에서 셜록은 어머니와 여동생을 찾기 위해 추리를 펼치지만, 이제 갓 세상에 발을 내딛는 에놀라의 어설픔과는 다른 의미로 어설프고 초라하다. 어머니의 소지품을 조사하는 몸짓이나 관련 인물을 취조하는 말은 천재 탐정의 매끄러운 수사보다 ‘킁킁거림’에 가깝다. 그레이스턴 혹은 이디스로 불리는 여성과 셜록의 대화에서 셜록이 극 내에 조성하는 불편감은 명료해진다. 셜록이 사소하고 세밀한 단서들에만 코를 가져다 대고 있을 뿐 ‘여성 참정권’과 ‘여성 인권’이라는 거대 맥락에는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다. 셜록은 권력 없이 사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여기에서는 한 가지 사실이 더 폭로되는데, 이는 셜록의 무지가 ‘고의적’이라는 것이다.¹ 이디스의 말마따나 셜록에게는 이미 딱 좋은 세상이기 때문에 그는 고의로 여성 문제에 눈을 감는다.
이디스는 셜록에게 “당신 형처럼 말하지 마”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정말로 둘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상정하는 문장이라고 보기 어렵다. 영화에서 제목이 중요하게 드러나는 책(후작의 런던 어쩌고는 에놀라가 런던 이후의 글자를 손가락으로 가리는 장면에서 이미 ‘런던’만이 중요한 단어임을 상정한다.)은 단 두 권인데 하나는 존 스튜어트 밀 여성의 종속(The Subjection of Woman, 1869)이고, 다른 하나는 헬렌 블랙번의 사회 정치적 운동에 몸담은 여성을 위한 안내서(A Handbook for Women Engaged in Social and Political Work, 1881)다. 전자는 마이크로프트가 어머니가 ‘페미니즘이라는 정신 나간 짓’에 몰두했다는 증거로 거론하며 후자는 셜록이 이디스의 가게에서 마이크로프트를 동원해 가게를 수색할 근거가 되는 ‘불온서적’으로 언급된다.
다음 단락에서 자주 거론될 마이크로프트에 비하면 셜록은 이성적인 인물처럼 보이지만 그의 행적을 낱낱이 살펴보면 그도 마이크로프트와 다를 바 없다. 이디스의 가게에 제멋대로 들어와 이디스가 자신의 손님들을 해치려 든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선언에(이는 방어적 공격성에 가깝다)그는 “우리는 서로를 해칠 수 있어요.”라고 말하며 이디스로부터 경계심(왜겠냐)을 누그러뜨리라고 종용한다. “주전자가 그 손에 있으면 무기”라고 이야기하는 그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손에 들린 물건이 무엇이든 충분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며, “말씀을 참 곱게 하신다”는 빈정거림에는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고 위협하면서도, 온화한 다정함을 요구하는 거리낌 없는 태도가 배어 있다. 사소한 것에만 집착하며 세상을 바꾸는 데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방관자로 명명된 태도는 적나라한 지적 이후로도 전혀 바뀌지 않는다. 이미 언급된 것처럼 그는 바뀌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므로.
여성 혐오적 요소를 담고 있지 않은 심한 욕과 더 심한 욕을 언급하고 싶었으나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순한 맛으로 적어 본다. 나쁜 새끼 이야기를 충분히 했으니 더 나쁜 새끼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적당히 마라 양념을 쳐서 읽어도 좋을 문장이다. 영화에서 세 번째로 깨지는 것은 가부장제, 즉 영화 내에서 가부장인 마이크로프트의 계획과 권위다. 여기에서는 넷플릭스에서 제공하는 영어 자막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순한 맛과 마라 맛이라는 표현을 다시금 빌려오자면 자막은 순한 맛이다. 순하다 못해 맹탕이 되어버린 문장마저 보인다. 혀뿌리에서 느껴지는 맛의 차이가 외국어에 기인한 것일지, 즉 타국의 언어라 언어체계 내에 존재하는 관습과 관용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여 지나친 충격으로 받아들인 것일지를(가령 역으로 맛있는 음식을 앞두고 한국인들이 뱉는 격한 표현들이 외국인에게는 얼마나 충격적일 것인가) 고민해 보아도 눈과 귀에서 느끼던 이질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마이크로프트가 에놀라를 설명하는 단어들은 그 자체로 폭력적이다. 천방지축(She’s unbroken, 영영사전을 찾아보면 가장 유사한 뜻으로는 ‘말’ 등을 가리켜 누군가를 태우는 것에 길들지 않은, 고분고분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즉 ‘꺾이지 않은’ 상태이며 길들지 않았고(untamed), 조련되지 않았다(untrained). 누구를 가리키는지 불투명하게 둔 채 읽는다면 누가 이를 가리켜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 상정하겠는가.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의 논리에 기반하여 내리는 결론이자 영화 내에서 그가 한결같이 유지하는 목적은 그가 당구대 위에서 셜록에게 건네는 말로 요약된다. “그 애는 싹 다 뜯어고쳐야 해(We need to break her and build her up).” 마이크로프트에게 있어 부수고 그의 욕망대로 재조립되어야 하는 것은 에놀라, 그 자체다. 마이크로프트에게 에놀라는 사회적 압력에 의하여 깨지고(break), 길들여지고, 조련될 필요가 있는 대상이다.
마이크로프트가 인간적인 존중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문장을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그가 가부장이기 때문이다. 에놀라가 개인 내적으로 반사회적이거나 공격적인 성격 양상을 보이기 때문도,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행동을 보였기 때문도 아니다. 그의 행동의 근거를 타당하게 하는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어머니가 아니라 내가 이 집의 주인”이라는 그의 선언 대로 그가 가부장이기 때문이며, “내가 네 보호자야”라는 선언의 원문(You are my own)에서 드러나듯이 가부장제하에서 여성이 가부장에게 속하는 객체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하에서 그의 선언은 틀리지 않다. 에놀라는 가부장인 그의 관리·감독 대상이자 소유물이며 에놀라의 긍정적인 특성들과 강점은 모조리 가부장제에 반하는 결점으로 치환된다.
마이크로프트가 에놀라의 미래에 예비하는 교육원(Finishing school)은 그런 의미에서 얼마나 적합한 명칭인가. 교육원에서 에놀라의 자유롭게 말하고, 걷고, 생각할 권리는 모두 끝난다(finish). 셜록과 재회하는 장면에서 에놀라는 인간으로서의 욕망과 활기가 모두 소거된 것처럼 보인다. 사회화가 완료(finish)된 것 같은 지점에서 양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에놀라는 오래된 초상화 속 여인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마리안느가 최초로 그린 그림 내지 벽에 걸려 있는 엘로이즈의 어머니 초상화와도 같은 모습이다. 아름답고 우아하나, 생의 흔적 중 어떤 것도 용인되지 않아 삶이 느껴지지 않는 매끈한 그림. 죽음으로써 완성되는 정적 미학이 이마부터 발끝까지 검은 베일처럼 드리워져 있다. 그러니 수프 그릇을 뒤엎던 순간처럼 이 베일을 박차고 나가는 순간 에놀라의 외침이 고작해야 “난 숙녀 되려면 아직 멀었다”로 번역된 점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다.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다. 숙녀가 모종의 이상향처럼 상정되고, 이를 ‘아직’ 달성할 수는 없다는 지연이 고작해야 최선이었을까. 교육원(finishing school)에서 빠져나오며 외치는 “나 아직 안 끝났어(I’m not finished yet)!”는 교육원을 향하여 드는 반기인 동시에 마이크로프트를 향해 외치는 에놀라의 일갈인데.
에놀라의 일갈에 이르기까지, 『에놀라 홈즈』는 성별 고정관념과 셜록 홈즈의 위상과 마이크로프트 홈즈로 대표되는 가부장제를 깨부수고자 했다는 점에서 속 시원한 영화다. 속 시원한 영화여야 한다. 그런데 왜 이 영화가 시종일관 내고자 하는 파열음이 마냥 청량하고 시원하게 들리지는 않는가. 영화가 깨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깨지 못해 끝내 깨고야 마는 지점들은 어디에 있는가. 영화가 깨지 않았어야 했는데 깨버린 것은 무엇인가.
영화가 깨지 못한 것 혹은 깨지 않았어야 했는데 깨버린 것
『에놀라 홈즈』는 두 시간짜리 영화다. 그리고 기승전결의 구조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를 네 대목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최대 십분 안팎의 오차범위를 감안하더라도 이 네 대목에서 에놀라는 끝없이 무언가를 잃거나 포기한다.
기승전결 중 ‘기’에 해당할 영화의 1/4지점까지는 영화 속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인물들이 소개되고 각자의 성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에놀라는 후작을 처음으로 만났다가 헤어진다. 후작과 만난 첫 순간부터 에놀라는 후작의 개인 서사에 개입하지 않고자 한다. 에놀라 자신의 서사, 즉 어머니를 찾는 딸의 이야기가 분명히 중요한 문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에놀라가 상기하는 어머니의 경고(“Paint your own picture”²)는 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특히 남자 때문에 휘둘리지 마. 부연 설명까지 붙어 있던 경고를 떠올리고도 에놀라는 자신의 계획을 접고 남성에게 되돌아간다. 엄마를 찾기 위한 에놀라의 첫 번째 계획(기차를 타고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목적지에 도달한다)은 이 대목에서 깨진다. 『에놀라 홈즈』가 영화화한 소설의 제목이 ‘사라진 후작’임을 감안하면 후작의 서사는 영화 전체를 이끌어 갈 사건이며, 따라서 이때의 에놀라의 휘말림은 필연적이다. 그렇게 설명되고 면책될 수 있다.
가까스로 런던까지 도착해 엄마의 암호를 풀고, 엄마에게 새로운 암호문을 발송하는데 에놀라는 성공한다. 그러나 영화의 2/4 지점에 이르러 에놀라의 계획은 다시 한번 깨진다. 라임하우스 레인이 등장하는 이 장면에서 에놀라는 예상하지 못했던 악인과 마주하여 놀라지만 관객은 예상하지 못한 장면들과 마주하여 놀라게 된다. 라임하우스 레인을 지나는 가난한 모녀의 뒷모습은 왜 삽입되었는가. 에놀라의 윙크는 짜릿하지만, 성인 남성이 어린 에놀라에게 가하는 물고문 장면은 지나치게 길지 않은가. 에놀라의 목을 가해자가 양손으로 잡는 장면은 불필요하게 구체적이지 않은가. 이러한 장면 속에서 변장에 능한 에놀라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될 수 있음’을 오랜 기간 배워왔음에도 불구하고 연신 치렁치렁한 드레스 차림이다. 신발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에놀라가 그 드레스 아래에 셜록이나 마이크로프트가 신을 법한 신발을 신었을까. 글쎄.
남자 감독이 연출하는 액션 영화에서 여성은 자주 하이힐을 신고 있거나 자주 과한 치장 차림으로 나타난다. 나약하고 섬세해 보이는 모습으로 액션을 수행하는 장면이 그 상반되는 특성으로 인하여 놀랍고 새롭게 보이기는 하지만 비현실적임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감히 단정하건대 그건 안 입어본 결과다. 무지에서 나오는 결과다. 하이힐을 신고도 뒤돌려차기를 훌륭하게 해내는 것은 여자 배우의 뛰어남이지만, 하이힐을 신고 오래 걷거나 뛰는 것부터 신체에 얼마나 큰 무리가 되는지, 그걸 신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고 뒤돌려차기를 하는 것이 보는 이의 시각적 쾌감이나 미감에는 감동적일 수 있겠으나 실제로 신체를 움직이는 자에게 얼마나 큰 제약이 되는지 모른 결과다.
이 전투를 끝내고도 에놀라는 스스로의 기지와 순발력에 감탄하고 성취감에 젖는 것이 아니라, 죄책감을 느낀다. 나약한 남성과 달리 우수한 힘을 가지고 있으나 벼랑 위에 서 있던 남자를 외면했다는 죄가 스스로 부과된다. 이 지점에서 에놀라는 ‘강한’ 어머니를 찾는 일은 잠시 ‘약한’ 남성을 구하기 위하여 미루겠노라고 스스로 선언한다. 에놀라의 초기 목적은 이 지점에서 완전히 깨진다. 에놀라의 ‘혼자임’은 1/4 지점까지 스스로든 타인에 의해서든 ‘안쓰럽고 애처로운 점’으로 기능하다가 2/4 지점에서 셜록과 이디스의 대화를 통해 ‘남자 없이 혼자여도 괜찮은’ 자립으로 선언되지만 바로 직전 장면으로 인해 설득력이 약해진다. 혼자여도 괜찮지만, ‘혼자여도 괜찮을 만큼 강인하기 때문’에 연약하며 혼자인 남성을 도와 마땅하지 않겠느냐는 서사로.
심지어 그 시도가 어떠한 형태로까지 구체화되는가하면, 영화의 3/4 지점에서 에놀라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쫓기는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유를 먼저 포기한다. 그 과정에서 에놀라가 남자에게 건네는 말은 다소 충격적이다. “난 잡혀봤자 내가 원하지 않는 인생을 살 뿐이니까.” 생물학적 죽음과 사회적 죽음의 가치를 비교하는 무익한 계산은 미뤄두더라도, 이 지점에서 에놀라는 분명히 ‘타인을 돕더라도 너 스스로가 위험해서는 안 된다’라는 엄마의 가르침을 잊는다. 깨버린다.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남성을 위해 에놀라는 자신의 사회적 죽음을 불사한다. 이것을 과연 용기라 부를 수 있는가. 실제로 에놀라를 잡은 레스트레이드는 에놀라를 잡은 것이 더 뿌듯하다고 이야기한다.
(맥락에서는 벗어나지만 에놀라에게 더 낮은 현상금이 매겨져 있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놀라에게 매겨진 금액은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의 소유물에 매긴 가치이므로 에놀라 자신의 가치가 가부장제하에서 얼마나 평가 절하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금액을 매기는 데 있어 에놀라가 지닌 지적 능력이나 신체적 능력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반면 후작은 식물학적 지식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능력적인 우수함도 부각되지 않지만 그의 출신과 성별(남성)이라는 점에서 평가 절상된다.)
3/4지점이라고 하기에 이 대목은 6~7분 정도 이르다. 그러나 그 이후 장면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에놀라는 ‘가르친 대로만 말하라’는 교육원에서 걷는 법, 말하는 법, 생각하는 법을 학습한다. 학습한다는 단어를 잃는다는 말로 치환해도 적절하다. 조금 더 뒤로 넘어가 볼까. 이 교육원에서 완전히 끝날(finish) 뻔한 에놀라를 후작이 와서 구한다. 물론 후작의 작전은 그의 캐릭터가 그렇듯이 허술하고, 이를 완성하는 것은 에놀라다. 그러나 그는 뭐라고 말하는가. “작전은 내가 구상했지만 결국 날 구한 건 너야.” 이 영화에서 가장 불필요한 대사다.
엄마를 구하러 가려던 계획, 목표, 자신의 사회적인 삶을 차례로 버렸던 에놀라가 영화의 1/4 지점에서 버리는 것은 대시(애착 인형)다. 셜록은 에놀라가 두고 간 대시를 보고 웃는다. 셜록은 에놀라가 완전히 알에서 깨어났음을 안다. 대시는 에놀라가 오빠들의 계획을 모두 꿰뚫고 거기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증표인 동시에, 에놀라가 마냥 어리고 ‘세상 물정을 모르던’ 시절을 상징한다. 이 ‘버림’은 유일하게 긍정적인 의미다. 따라서 이 버림은 완전한 유기의 형태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에놀라가 다시 이를 가져가 어머니와 재회하는 장면에서 ‘어머니가 어린 시절부터 기억하고 간직해 온 에놀라의 특별함’을 상징하는 매체로 부드럽게 회복된다.
그러나 셜록은 웃지 말았어야 했다. 셜록이 영화 내에서 냉소가 아니라 진실로 미소짓는 순간은 딱 두 차례 나오는데, 하나는 경찰서에서 에놀라가 자신보다 앞서 사건을 해결했을 때이며 또 다른 하나는 에놀라가 오빠들의 계획을 꿰뚫고 광장에 대시를 두고 간 것을 발견한 순간이다. 마냥 어리게 보던 동생이 어느새 자라나 자신보다 한 발짝 앞서 움직이고 있음을 보며 뿌듯하고 대견해하는 감정은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그가 정치적인 문제나 감정적인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퀴즈 문제에 골몰하는 아이처럼(영국의 드라마 시리즈 『셜록』의 셜록이 더 이러한 특성을 두드러지게 보인다) 사건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이디스도 마이크로프트도 이를 지적하고 비아냥거린 적이 있음을 생각하면 다소 불쾌한 지점이다. 에놀라가 실제로 그를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장자 내지 더 권위자로서 에놀라의 성취를 ‘기특해’한다. 그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그가 에놀라를 자신과 같은 탐정으로 인식했다면 그는 너그럽게 웃음을 터뜨리는 게 아니라 분했어야 한다. 먼저 사건을 해결하지도, 끝내 한 수 앞서지도 못했음에 분하고 애석해했어야 한다. ‘어머니의 평과는 달리 동생을 제법 신경 쓴다’는 말이 이 장면들을 위한 복선으로 기능해 면죄부가 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에놀라가 남성으로부터 승인받는 장면이 도대체 왜 필요했는가. 그는 이미 승인 없이도 완성(FINISHED)되었는데.
사건을 먼저 해결한 것은 에놀라지만 결국 그의 어머니가 불복종운동으로 성취하고자 했던 것이 에놀라가 살려준 ‘남성’의 한 표(심지어 이 새끼는 아버지와 비슷한 의견을 가졌다고는 묘사되지만, 정치적으로 해박하다든가 정치적으로 왜 그러한 진보적 견해를 가지게 되었는지 서술되지 않는다. 물론 이 영화 내에서 이러한 대목을 길게 서술할 필요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되지만, 하다못해 페미니즘 서적이 오두막 한 켠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 식물 연구에만 골몰하던 새끼가 일찍 재기한 아버지 어깨 너머로 얼결에 익힌 성향에 기반해-심지어 가족 내에서 할머니가 왕성하게 정치적 활동을 하며 정치적 입장을 강경하게 가졌음에도 불구하고-찍은 한 표)로 달성된다는 점도 맥이 빠지지 않을 수야 없다. 영화는 이를 에놀라의 성취로 포장하지만 정말로 에놀라의 성취인가? 한 표 차이로 통과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한 표 차이가 나기까지 에놀라의 어머니를 비롯한 여성들이 끝없이 가시화했던 노력은 어디로 깨어져 사라졌는가? 아빠와 오빠가 사라진 자리에 엄마와 홀로 남아 있다가, 엄마마저 사라져 완전히 혼자가 된 애처로운 딸이었다가, 쓸모없는 남자애 따위 없이 혼자여도 괜찮게 되었던 에놀라가 왜 ‘너는 혼자가 아니야’의 서사로 흘러가 손등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받은 입맞춤에 벅차하는가. 남성으로부터의 구원과 승인을 왜 영화는 끝내 깨지 못했는가.
물론 에놀라의 상실을 상실이 아니라 교환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글의 도입부에 이야기했듯이 『에놀라 홈즈』는 추리, 스릴러, 미스터리 영화인 동시에 그러한 요소보다도 ‘성장’에 강력하게 초점을 둔 영화다. 에놀라는 자신의 목표와 계획을 잃는 대가로 성장의 계기가 되는 사건을 맞이하며, ‘혼자임’을 잃는 대가로 협력과 숭고한 희생정신과 용기와 로맨스를 학습해 나간다. 그러나 그 과정이 정말로 그렇게 그려져야만 했는가, 그 모든 학습이 정말로 필요한가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던져볼 수 있다.
2006년에 최초 발간된 원작을 읽지 않았으므로 작품이 지니는 한계를 모조리 남자 감독 탓으로 돌린다면 감독 입장에서는 억울한 지점들도 있으리라. 그러나 알 바인가 원작의 한계라 할지라도, 2006년에 발간되었던 책을 2020년에 영화화하며 반성 없이 옮겼다면 감독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코르셋 덕분에 목숨을 살리는 여자와 갑옷으로 목숨을 건지는 남자를 그려낸 죄다. 사적인 공간의 중요성에 관하여 어려서부터 누누이 교육을 받은 에놀라는 목숨을 부지해 주겠노라는 자비와 대의의 일념으로 남자를 ‘자기만의 방’ 안으로 들인다. 이때 후작은 무엇을 하는가? 에놀라가 벗어 놓은 속옷을 발견한다. 그다음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방 주인의 속옷을 목도한 외부인이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에놀라다. 에놀라가 속옷을 황급히 감추는 장면은 영화 내에서 무슨 기능을 하는가. 어머니가 강조했던 사생활과 사적 경계의 중요성?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코르셋을 사 입으며 에놀라는 자신의 구입 목적이 다른 여성들과 다르며, 엄마가 준 돈을 감출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에놀라를 자신의 소유물로 취급하는 마이크로프트가 에놀라로부터 어머니가 남긴 에놀라 몫의 금전을 요구할 때 에놀라는 왜 굳이 자신의 가슴에서 돈을 꺼내어 마이크로프트에게 건네는가. 가슴께에 돈을 숨길 수도 있는 기능은 코르셋 판매점에서 앞서 언급하긴 했으나 에놀라는 방을 계약하고자 할 때 여자 주인에게는 가방에서 돈을 꺼내어 보여준다. 가슴에서 돈을 꺼내어 건네는 장면은 에놀라의 가치가 그 순간 얼마나 바닥으로 치닫는가를 보여주는 것 외에는 불필요한 연출이며, 그 기능 자체로도 불필요하고 과하다. 감독의 분명한 한계다.
영화가 깼다고 평가되지만 실제로는 깨지 않은 것
『에놀라 홈즈』에 낮은 평점과 함께 매겨지는 주된 비판은 (1) 추리적 요소, 정확히는 추리에 능한 탐정의 면모가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점과 (2) 카메라를 향하여 말을 거는 연출이 불편하다는 점이지만 이 두 요소는 『에놀라 홈즈』가 『셜록 홈즈』와 똑같기를 바라는 기대에 기인한 것이지 영화 자체의 실패는 아니다. 영화에서 에놀라는 셜록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인용하고, 전략이 지나치게 과하거나 일관적이지 못하고(정체를 감추기 위하여 미망인 복장을 했으나 미망인 복장을 하고도 여성 탐정으로 자신을 소개하며, 다시 셜록 홈즈 아래에서 일한다고 고백한다), 어설프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말하는 바와 같이 『에놀라 홈즈』는 성장기다.
주인공은 갓 열여섯 번째 생일을 넘긴 어린 여성이다. 후반에 이르러 에놀라는 알을 깨고 나온다. 셜록보다 한 수 앞서기 시작한다. 『셜록 홈즈』의 유년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나온다면 그때도 과연 지금과 같은 비판이 등장할 것인가. ‘그 셜록 홈즈가 어렸을 때는 귀여웠네’로 포장될 것이다. 이민경 작가의 『잃어버린 임금을 찾아서』에서는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을 대하는 문법으로서 ‘그런데’와 ‘그래도’의 문법을 소개한다. 그 문법대로 옮겨보자면 에놀라는 그런데 너무 어설프고, 그런데 너무 과하고, 그런데 너무 충동적이다. 반면 셜록은 그래도 나중에는 훌륭한 탐정이 될 것이며, 그래도 똑똑하며, 그래도 잘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두 번째 지적을 생각해 보라. 에놀라와 같이 직접적인 대화의 형식은 아니더라도 영국의 『셜록』이 베이커가 221B 주소를 말할 때는 카메라 너머의 관객에게 직접 말하는 것처럼 들리도록 의도한 바 있다. 『유령신부』 편에서도 셜록은 자신이 상상하는 장면을 시작하거나 전환할 때 “처음부터 시작해 보죠.”, “잠시만요.”라고 이야기하며, 레스트레이드 경감조차도 “다음에 일어난 일 때문이지.”라고 말하며 카메라 정면을 응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제4의 벽을 허무는 더 본격적인 작품들을 생각해 보라. 데드풀, 파이트클럽,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살인의 추억은 카메라 너머로 직접 말을 걸거나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관객을 바라본다. 네 작품 모두 제4의 벽을 허무는 연출이 불쾌하다거나 불편하다고 지적하는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오히려 작품이 지니는 ‘킥’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평가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불편한 것은 연출인가 아니면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여자의 시선인가.
『에놀라 홈즈』는 기존의 『셜록 홈즈』시리즈가 깨부수지 못했던 것들을 부수는 영화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이제 막 주인공이 알을 깨고 나서는 이야기이므로 반드시 후속작이 나와주어야 하는 영화다. 그러나 후속작을 찍기를 희망한다면 감독은 반드시 자신의 알을 깨고 나와야 할 것이며, 관객 역시 자신이 『셜록 홈즈』와 『에놀라 홈즈』를 비교하며 여전히 갇혀 있는 알에 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¹ 심지어 셜록은 극 초반에 마이크로프트로부터도 유사한 지적을 받는다. 책임감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며, 셜록은 기지를 발휘해 자신을 빈정거리고 비난할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마이크로프트조차도 셜록의 무책임함, 무관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잰 체 하는 태도를 꼬집는다. 마이크로프트가 가부장을, 이디스가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여성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셜록이 양극단으로부터 받는 동일한 지적은 그가 얼마나 뜬구름 같은 인물인지를 드러낸다. 그의 위상은 지면과 풍문 속에만 존재하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² 번역 이야기를 다시금 하지 않을 수 없다. 네가 그리고자 했던 그림을 그리라는 이야기가 왜 ‘지조를 지켜’로 번역되어야 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