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간

이틀 전 생일을 맞은 당신께

칠월[JULY] 2021. 4. 15. 02:56

달력 날짜로 이틀이 지났지만, 너그러이 양해를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반드시 필요한 순간이 아니라면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포용으로 알려주신 분이니까요.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배운 ‘죄송 금지’의 원칙을 준수하는 데도 익숙해져서 이제는 모임 내에서 죄송하다고 이야기하기보다는 “죄송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괜찮습니다”를 더 많이 말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 말이 여성에게 불어넣어 주는 힘을 믿으면서요. 오늘도 여성들과 나눈 이야기에서 유사한 말로 대화를 맺고, 여자에게 부칠 두 통의 편지와 한 편의 글을 앞두고 편지를 먼저 골라 쓰다가 편지함을 열었습니다.

생일을 맞았다는 소식은 SNS를 통해 먼저 들었어요. 생일을 기념하는 편지가 도착할 예정이라는 사실도 함께 들었습니다. 퇴근길에 편지함을 한 차례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화요일에 편지함을 확인하는 습관이 생긴 지도 한참 되었습니다. 첫 편지가 도착했던 게 작년 칠월 말의 일이니까요. 구월까지 체리가 매달려 있던 편지 겉봉에 파도가 일기 시작하다가 점차 알록달록해진 걸 볼 때면 편지에 적힌 발신인에 더해진 이름들을 볼 때와 같은 기분이 듭니다. 함께 보낸 시간을 돌이켜 볼 때와 닮은 기분이기도 하고, 함께 보내지 않은 시간 동안 서로가 보낸 시간을 가늠할 때의 기분이기도 합니다. 둘은 아주 다른데도 뭉클하고 애틋한 기분이 드는 것은 항상 같아서 그걸 떠올리면 또 신기한 기분이 되곤 합니다.

우리는 유월에 만났고, 생일이 사월이라는 이야기는 조금 더 후에 들었습니다. 이름의 유래는 그때 함께 들었지만, 태어나던 날의 일을 상세하게 들었던 건 아니라서 오늘 편지를 통해서야 자세하게 짐작해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교실 안에 앉아 있는 대신 교실 밖에서 흘러나온 웅성거림을 한 박자 늦게 전해 듣고 있었어요. 아침햇살과 관련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는 아침햇살을 오래 좋아해 온 사람으로서, 정말 문자 그대로 ‘아침햇살’ 생각만 했던 기억이 납니다. 편지를 읽다 말고 B에게 “나 말고도 아침햇살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대!” 했을 정도니까요. 탐정 수사의 일에서 보자면 아주 틀린 셈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둔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침햇살이 얼마나 구린 음료인 줄도 모르고 마시는 여자들은 눈치가 없다’는 말의 극단적인 예일 수도 있겠습니다.

함께 보낸 시간 경계 바깥에서 저는 편지 첫머리에 적혀 있던 『레즈비언 선택』을 읽었습니다. 여러 레즈비언과 함께요. 그리고 함께 만나, 장마다 각자 적어 온 질문들을 함께 펼쳐보았습니다. 같은 곳에 밑줄을 긋곤 한 것처럼 꼭 닮은 질문들도 있었고, 누군가가 물음표를 적어 놓은 문장을 다른 누군가가 명쾌하게 설명해 줄 수 있었던 것처럼 아주 다른 질문들도 있었습니다. 나란히 책을 읽곤 했던 시간들도 있었던 만큼, 제가 적었던 질문들을 공유해 보자면 저는 이런 질문들을 적어갔습니다.

2장 : 출간된 후로 꽤 시간이 흐른 만큼 2장에서 제시된 분류가 충분한가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보아도 좋겠습니다. 제시된 세 가지 분류에 포함되지 않는 영역 내지 추가되었으면 하는 분류가 있을까요?
3장 : 기혼, 이성애 페미니스트에 관한 여러 생각들을 해보게 되는 장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14페이지 마지막 줄의 의미를 나누고 싶습니다. 
4장 : 레즈비언 윤리와 관련하여 고민해 본 대목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레즈비언들을 대상으로 하는 여성 사업장에 관한 생각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하략)

순서대로라면 1장에서 마련한 질문이 가장 먼저 나와야 하니 의아하셨으리라 짐작해봅니다. 1장에서 저는 4월 13일에 수신했던 편지를 떠올리며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레즈비언 문화라고 추리하게 되는 단서들 혹은 잘못 추리하였던 경험들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라고요. 아침햇살을 말 그대로 아침햇살로만 읽었던 사람이 던지게 된 질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조금 웃긴 대목이 있지요. 묻던 때는 인지하지 못했는데, 어쩌면 경험에서 우러나온 질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제때 정확하게 암호를 해독하는 건 실패했지만 암호가 적혀 있던 편지는 우리가 유월에 만날 수 있게끔 했고, 저는 편지에 적혀 있던 책을 끝까지 읽던 즈음에는 그 편지에 적혀 있던 채은 씨의 경험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꾸준히 여성을 만나며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레즈비언이라고 생각하게 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정확하게 바라보게 되었거든요. 그런 여성이 혹은 그랬던 여성이 주위에 아주 많다는 사실도요.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어느 날 레즈비언으로 살기를 선택했으며 그 사실에 긍지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과, 동일한 긍지를 느끼고 있는 레즈비언들 속에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건 아주 안전하면서도 벅차오르는 기분이었어요. 『레즈비언 선택』 네 권이 올려져 있던 책상 맞은편에 앉아 레즈비언으로 사는 것의 즐거움과 뿌듯함에 관하여 이야기하던 여성의 들뜬 얼굴을 기억합니다.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다른 레즈비언들의 얼굴도요. 

나란히 글을 쓰던 때에 비하면 아주 드물게 쓰게 되었는데도, 그날의 경험이 어지간히 강렬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랜만에 긴 글을 적게 되었습니다. 글 중 독서 모임에서의 경험을 언급한 대목을 잘라 단체 대화방에 공유했고, 그 다음번 모임에서는 ‘글에서 무언가를 결심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무언가 겪은 변화가 있었는지’ 질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생각하지도 못한 질문에 볼이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고, 질문의 의도에서 비껴간 대답을 횡설수설했던 기억이 납니다. 긴 대답의 요지는 사실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는 말이었는데, “일상에서의 별다른 변화는 없고 레즈비언으로 사는 삶에 조금 더 긍지를 느끼게 됐습니다”라고 대답했어야 정확했다고 오래 후회했습니다. 그 긍지는 함께 이야기를 나눈 레즈비언들 덕택이라는 이야기도 꼭 해야 했는데 말이에요. 다음에 만나면 이 이야기를 꼭 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필요한 사과는 삼가는 게 맞지만 감사와 응원은 언제나 과잉이 없다고 생각하는 만큼요.

그리고 이 긴 이야기를 꺼낸 이유도 같은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 모임에서 긍지를 나누어 받을 수 있었던 건 우리가 만나고 함께 보내온 시간 덕분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레즈비언으로 사는 삶의 기쁨을 정확한 언어로 설명할 수 있게 된 건 책의 마지막 장을 닫고 난 후의 일이지만, 그게 가능했던 건 함께 보낸 시간 속에 새겨져 있는 즐거운 순간들 때문일 테니까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만큼이나, 태어난 날을 온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저는 『레즈비언 페미니즘 선언』과 『설랑』을 다음 책으로 읽었고, 며칠 전에는 언젠가 임솔아 작가의 『최선의 삶』을 인용하며 말씀드린 적이 있었던 보드게임 《아임 더 보스》를 레즈비언들과 모여 했습니다. 앞으로도 정기적으로 읽고 놀 예정이에요. 그러면서 함께 보내던 시간만큼은 아니더라도 지금보다는 부지런히 겪고 느꼈던 일들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편지를 통해 어떻게 지내시는지 꾸준히 전해 들으며 마찬가지로 잘 지내고 계시기를, 많이 웃고 많이 떠들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시기를 바라고 있겠습니다. 조금 멀리 떨어져 앉긴 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같은 교실에 앉아 있으니까요.

생일을 맞은 레즈라이트의 모든 분들께
사랑을 담아
초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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