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간

2020년 8월, 레즈라이트 이카고 님께

칠월[JULY] 2021. 3. 8. 21:50

제가 물고기라면 아가미를 떼어드리고 싶네요
코 막힐 때 쓰기 좋습니다
잠수타고 싶을 때도
비가 코밑까지 내릴 때도 쓰기 좋습니다
내가 어항 속에 부어진 것 같은 날에도
습도 높아 불쾌함이 첨벙대는 여름날에도
하나 달아두면 이런 날 저런 날 쓰기 참 좋습니다
당신이 부서지듯 숨 쉴 때가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공기에도 익사할 것 같을 때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숨을 드리고 싶다는 말입니다

박가람, 숨
『사랑과 가장 먼 단어』

수신자가 없는 편지를 적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일기나 반성문의 형식을 취하기보다는 대개 서로가 서로에게 불투명한 그림자로 존재하는 집단 내에 속해 있을 때, 그 집단 자체나 집단 내의 불특정 다수를 수신인으로 삼고 싶을 때 그렇게 적습니다. 오늘도 그런 편지를 적으려고 글을 쓸 때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열었다가, ‘수신자가 없는 편지를 적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하는 문장을 적었다가, 올라온 글을 읽으며 편지에 옮겨 적으려던 시를 급히 바꾸었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것이 거대한 수조 속에서 헤엄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읽었고, 같은 생각을 하던 때가 떠올랐고, 그때 공기 방울처럼 머릿속에서 펑 터지던 시가 등을 슬쩍 떠밀었거든요. 습기를 머금어 무거워진 공기와 그 무게만큼 숨이 옅어지기 쉬운 날, 수면 근처에서 가느다란 숨을 쉬고 있는 자매에게 다가가기 위해 저는 지느러미로 물살을 부지런히 가르고 있습니다. 갈퀴가 달리지 않은 손가락을 자판 위에서 열심히 움직이는 방식으로요. 수신인 미상으로 부치려던 편지는 사실 이 시를 중심에 놓고 싶었어요.

그것은 함께 공원을 걸을 때의 일이었다

나는 중앙공원의 분수대 앞에 있었다
너는 센트럴파크의 분수대를 지나갔다

네가 한낮의 공원에 서 있으면
나는 어둠에 붙들리고

개를 데리고 나온 여자가 개를 놓쳤다
그러자 그곳에서 자전거가 쓰러진다

우리는 함께 공원을 걷고 있었다

여자의 비명이 동시에 들려올 때
점점 짙어지는 어둠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무엇일까, 마주 잡은 반쪽의 따뜻함은

갑자기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내가 어둡다, 말하자
네가 It’s dark, 말한다

황인찬, 듀얼 타임
『구관조 씻기기』

속해 있던 독서 모임에 이 시가 우리의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한다는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어느 날의 새벽 네 시에 읽은 책에 누군가는 오후 네 시에 흔적을 새기기도 하고, 누군가가 몇 달 전에 읽은 책을 누군가가 한참 후에 따라 읽는 모습을 보면서요. 무기명으로 모인 집단은 사실 이 시의 모습과 다 조금씩 닮은 구석이 있겠지요. 레즈라이트에 글을 쓰고, 읽고, 감상을 적거나 하트를 그리면서 저는 우리의 모습도 이 시와 참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시가 우리의 모습을 닮았지요. 때로는 붙어 있고 때로는 떨어져 있는 모습¹처럼. 때로는 함께 있는 것처럼 닮았으면서도 때로는 아주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모습으로요.

수신인이 생긴 편지가 된 이상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로 옮겨보자면, 오늘 아침 산책로를 걸으시던 때에 저도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다른 산책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동굴 속에 있다가도 샌드위치를 먹으러 나오는 곰이 되시던 즈음에 저는 사흘 굶은 호랑이의 심정으로 오르막길 막바지를 걷고 있지 않았을까요. 대부분의 도서관이 까마득한 오르막길 끝에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살았습니다. 도착하고 나니 어느새 숨이 가빴지만, 도서관은 사흘 만에 먹는 첫 끼 이상으로 반갑고 좋았어요. 배고플 때 장 보러 가는 게 아니라고 하던데. 대출 가능 권수를 꽉 채우는 욕심을 부리고 나서도 도서관 방문이 잦아지면 자연스럽게 사라지리라 제멋대로 면죄부를 남발했습니다. 이제는 활자를 꼭꼭 씹어 삼키는 일만 남았어요.

내려오던 길에는 일기예보에 등장하지 않았던 소나기를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바람에 젖은 잎사귀가 나부낀 탓인 줄만 알았어요. 혹시 몰라 챙겼던 삼단 우산을 부랴부랴 펼치고 나서 문득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빗소리가 좋아 짧게 녹화를 했어요. 참 건조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살았는데 어느새 촉촉해진 면이 많아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고 싶은 건 많은데, 그걸 다 해내기에는 필요한 게 참 많구나’ 라는 같은 생각을 하며 정류장까지 걸었어요. 닮으며 다른 하루 속에서 이카고 님의 날숨이 바람을 타고 타고 흘러서 제 등을 떠밀고, 제 숨결이 잎사귀 사이로 날아서 이카고 님의 등 뒤에도 닿았을까요.

처음 타보는 버스 노선을 타고 집 언저리까지 돌아오면서는 수신인 미정의 엽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편지를 적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이름도 얼굴도 모르다 보니 무엇을 쓰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좋아하는 작가의 말을 옮겨 적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문장을 옮겨 적다가, 레즈라이트에서 읽었던 자매들의 글이 떠오르면서, 레즈라이트에도 이 문장을 끌어안은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수신자가 없는 편지를 적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앞에는 이런 생각의 연쇄가 있었습니다. 문장과 행간에 새겨진 마음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자매에게 부치고 싶은 제 마음과도 닮아 있었지만, 약간의 불안함과 설렘²을 안고 있을 자매나 의지나 햇빛을 잃은 자매³에게도 통용될 수 있을 사랑시였거든요. 비가 오는 아침에도 빛으로 가자고,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아 새벽 어스름이 비쳐올 때도 우리가 이렇게 아름답다고 귓가에 속삭이고 싶은 마음으로요.

이것은 당신에게 보내는 나의 편지다. 나도 당신도 석고 인형으로 태어났다. 우리를 해치려고만 드는 세상에 스스로를 보호할 방도 하나 없이 던져졌다. 폭력이 우리의 인격을 조각했다. 당신이 인권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된 것은 크든 작든 폭력을 경험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폭력은 우리를 부수기도 하지만 우리의 인격을 더 정교하게 만들기도 한다. 폭력의 손잡이를 쥔 그들보다, 우리가 정교하다. 우리가 미래에 가깝다. 우리가 옳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석고 인형은 석고 인형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제라고 정확히 짚을 순 없어도 석고 인형이 금속 주물을 위한 틀이 되는 때가 온다. 청동이든 황동이든 철이든 더 단단한 금속을 입을 수 있는 때가 온다. 세계를 정확히 바라보고 더 나은 세계를 요구할 수 있는 이는 더 이상 약하지 않다. 어렵게 얻은 발언권을 모두를 위해 쓰기로 결심한 이는 약하지 않다. 지금의 페미니스트들은 빛나는 갑옷을 입고 나아갈 것이다. 나는 역사 전공자이고 SF 작가다. 시간의 단위를 길게 쓰는 직업인으로서 단언하건대,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

어쨌든 나는 이제 그 모든 압력이 거짓임을 안다. 한 여성의 몸과 마음은 오로지 그 여성의 것임을, 여성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행복해질 수 있음을 믿는다. 그 믿음이 나의 종교다. 당신도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언젠가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체화한 정교한 언어가 사슬처럼 연결될 것이다. 서로의 부서지고 금 간 부분이 금빛으로 수선된 것을 보고 웃을 것이다. 지난한 방식으로 마침내 갑옷을 얻은 여성들이 행진할 때에, 그 행렬 속에서 우리는 만날 것이다.

우리는 함께, 희고 무른 상태에서 영원히 벗어날 것이다.

정세랑, 우리가 석고 인형으로 태어났더라도
『나다운 페미니즘』

불안함과 설렘은 앞으로도 우리 앞에서 자주 넘실댈 테고, 그러면 우리가 네모난 수조 속에서 서로 떨어져 부유하는 날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서로의 숨을 조금씩 나누어 받고, 서로의 등을 조금씩 밀면서 우리가 서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저는 시간여행을 연구하는 학자도, 시간여행자도 아니지만 좋아하는 작가가 긴 시간 단위 속에서 본 풍경을 본 것처럼 믿을 수 있어요. 우리가 빛 속에서 단단하고 반짝이는 모습으로 만날 거라고요.

 

 

¹ me, [3주차] 1_붙어 있고 때로는 떨어져 있는

² 이카고, [2주차] 약간의 불안함과 설렘

³ 감기약(열정비언), [2주차] 의지의 부재 & 나오, [2주차] 햇빛을 봐야 사는 아이

⁴ 김레몬, [3주차] 빛으로 가자 & 김당근, [2주차] 사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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